[역사속 경제리뷰] 수문제 그리고 동양의 조세제도

2023-12-26     어기선 기자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수문제라는 인물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떠올리기를 고구려 원정에서 패배하고 돌아간 중국 황제쯤으로 취급한다. 하지만 동양의 조세제도인 ‘조용조’(삼정), 균전제 그리고 부용제 등을 확립시켰고, 이것을 당나라가 이어받으면서 당나라가 상당히 융성한 국가가 되게 한 원동력이 됐다. 그의 아들인 수양제가 폭군이 아니었다면 혹은 대운하 건설과 살수대첩에서 몰살 당하는 등의 고구려 원정이 실패하지 않았다면 ‘수나라’는 장기간 집권한 국가가 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런 이유로 중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꼽힌다. 왕조시대 중국과 조선 그리고 다른 동아시아 국가의 기틀을 수문제가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문제에 대한 후대의 평가

중국에서는 성군하면 ‘수문제’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만큼 수문제가 쌓아놓은 업적이 많기 때문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동양국가들의 조세제도 기반을 닦았다는 점이다. 물론 조용조나 균전제 그리고 부용제는 북위 때부터 내려오던 제도이지만 그것을 하나로 집대성해서 후대에 전파한 인물이 바로 수문제이다. 수문제가 동양의 조세제도 기반을 닦음으로서 중국의 역대 어느 국가보다도 인구가 가장 많은 국가가 ‘수나라’였다.

삼정 그리고 균전제

균전제는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하는 제도로 남북조 시대 북위에서부터 시작해서 북제, 북주로 이어졌다. 그러면서 수문제가 균전제를 확립했고, 그것을 당나라가 이어받았다. 균전제는 고려말 신진사대부가 등장하면서 그때부터 균전제 여론이 들끓었고, 그로 인해 과전법이 만들어졌고, 조선이 탄생하게 됐다. 그런 점에서 균전제는 동양의 여러나라에 영향을 미친 토지제도이다. 균전제를 실시하는 국가는 대체적으로 21∼59세의 성인에게 일정한 면적의 토지를 지급하고 조세와 병역을 부담시키고 노령이 되면 다시 회수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그러면서 부용제가 실시됐다. 즉, 토지를 경작하는 사람은 군역(軍役)을 지게 하는 방법이었다. 조용조는 토지에 대한 세금을 부과하고, 중앙에 대한 노동력을 부과하고, 가구(戶)마다 토산물을 부과하는 방식이다. 이것을 조선시대에 그대로 적용해서 토지에 대한 세금을 물리는 과전법이 만들어졌고, 가구마다 토산물을 부과하는 방식이 부작용을 일으키면서 방납의 폐단으로 이어졌고, 대동법이 만들어졌다.
드라마

세금도 면해줬던 수문제

진시황이나 한나라 등 통일왕조가 그 이전까지 있었지만 주로 귀족들에게 토지를 하사하는 방식인 봉건제 국가였다면 수나라 때부터 중앙집권 국가로 변모하게 됐다. 그것이 수문제의 업적이다. 수문제는 어떤 해에는 아예 세금을 걷지 않았다. 그만큼 수나라 재정이 좋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관료들의 뇌물수수를 싫어해서 뇌물수수 사건이 발생하면 관료들을 모두 참수했다. 더욱이 과거제 전신인 선거제를 도입하면서 귀족 출신이 아닌 사대부 출신이 중앙정부에 진출하는 기회를 만들어줬고, 이것이 당나라 때 문명이 융성하게 된 토양이 됐다. 그러면서 송나라 때가 사대부의 나라가 될 수 있었던 기틀을 수문제가 마련했다. 조선시대 때 왕들이 수라를 들 때마다 지방의 사정을 살피는 것이 있는데 이것 역시 수문제 때부터 시작했다. 수문제 당시 관중 지방에 대기근이 들자 수문제는 백성들이 무엇을 먹고 있는지 알아오게 했는데 콩껍질과 쌀겨를 섞어 만든 떡을 수문제에게 진상하자 신하들에게 그것을 보여주면서 자신이 정치를 잘못해서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면서 수라의 반찬을 줄이라고 했다. 이런 수문제의 행보가 당나라 때에는 율령제로 정착이 되면서 동아시아의 국가제도가 됐다. 만약 아들인 수양제가 폭군이 아니라 아버지인 수문제의 뒤를 따랐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수양제는 아버지의 유훈인 고구려 원정을 하지 말라는 말을 무시하고 고구려 원정을 했다가 살수대첩에서 대패를 하면서 수나라가 멸망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