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오늘리뷰] 12월 27일 동아일보 신탁통치 오보 사건

2023-12-27     어기선 기자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45년 12월 27일은 동아일보 신탁통치 오보 사건이 발생했다. 역사상 가장 오보의 사건으로 기록된다. 동아일보가 오보를 보도하면서 본격적으로 좌우 대립이 시작됐다. 그러면서 보수 진영이 득세를 하고, 진보 진영은 크게 위축되는 사건이기도 했다. 해당 오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세력도 상당한 힘을 얻으면서 그에 따라 이승만이 정권을 잡게 되는 계기가 된 사건이기도 하다.

모스크바3상회의 결과 전하면서

1945년 12월 미국과 영국 그리고 소련 외교책임자들이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스크바3상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미소 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한반도에 통일독립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5년 동안 공동위원회가 한반도에 대해 신탁통치를 시행한다고 합의를 했다. 이는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in due course(적절한 절차)’라고 합의를 했기 때문에 그 합의를 이행하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해방된 정국의 조선사람들은 ‘신탁통치’라는 단어에 대해 거부감을 가졌다. 그런 상황 속에서 동아일보가 오보를 한 것이다. 카이로 회담 당시 영국은 독립 반대, 미국은 신탁통치 실시, 중국은 즉시 독립을 제안했다. 그리고 얄타 회담에서는 중국 대신 소련이 포함됐는데 미국은 10년 신탁통치, 소련은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 이는 모스크바3상회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초 미국은 30년 신탁통치를 제안했지만 소련의 반대로 5년으로 합의를 한 것이다. 하지만 동아일보는 “소련의 신탁통치 주장, 미국 즉시 독립 주장”으로 전달했다. 통치 주체도 ‘임시정부’(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아님)로 합의를 했고, 최장 5년의 기간을 거쳐 자유총선거에 의해 통일독립국 건설을 보장한다는 합의 내용을 보도하지 않았다. 그리고 새로운 식민통치가 시작되는 것으로 보도했다.

신탁통치 보도에

이같은 보도가 나오자 우파는 즉시 독립을 주장하면서 대중의 정서를 자극했다. 당연히 신탁통치를 식민통치라고 생각한 국민들 역시 반대하고 나섰다. 좌파 역시 처음에는 신탁통치 반대 입장을 취했지만 통치 주체가 ‘임시정부’로 된 것을 확인하면서 신탁 찬성으로 돌아섰다. 어쨌든 외세가 아니라 임시정부가 통치 주체가 돼서 신탁통치를 한다고 하니 좌파 입장에서 찬성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우익과 좌익의 대결 양상으로 치달았다. 두 세력이 점차 적대시되면서 소위 빨갱이 탄압이 시작됐다. 우파는 신탁을 찬성하는 좌파는 빨갱이라면서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국민들 역시 우파의 목소리에 동조했다. 그러면서 좌파의 설자리가 좁아지기 시작했다.

만약 원래대로 보도했다면

동아일보가 만약 원래대로 보도를 했다면 현대사가 달라졌지 않았겠냐는 말이 나온다.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미국은 신탁통치 30년을 주장하고 소련이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가 신탁통치 5년으로 합의한 내용을 동아일보가 그대로 보도를 했다면 우리 땅에서는 당시 반미정서가 강했기 때문에 반미 정서가 더욱 확산됐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미군정이 9월 들어서면서 쌀값 폭등, 인플레이션 등이 발생하면서 반미 정서가 대중들에게 있었다. 그런데 동아일보 오보 사건으로 미국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면서 미국이 구세주로 전환됐다. 그러면서 미국에서 건너온 이승만 전 대통령의 입지가 더욱 커지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