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1월 3일 임꺽정 체포

2024-01-03     어기선 기자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562년 1월 3일(음력)은 임꺽정이 체포된 날이다. 임꺽정은 조선 명종 시절 활동했던 살인 방화를 일삼던 도적떼 두목이다. 조선시대 3대 도적으로는 홍길동, 장길산과 더불어 임꺽정을 이야기한다. 다른 도둑들은 관군과 맞붙은 사례가 별로 없지만 임꺽정은 관군과 맞붙어 이겼을 뿐만 아니라 나라를 뒤엎을 정도로 위세가 강했던 도적이 없었다. 다만 오늘날에는 의적으로 평가를 받지만 의적은 아니었다는 것은 그 역사적 기록에 자세히 나온다.

백정의 신분으로

임꺽정의 신분은 ‘백정’이다. 흔히 백정하면 짐승을 도축하는 것을 업으로 생각하지만 버드나무로 생활도구를 만드는 일을 하는 고리백정이었다. 임꺽정은 경기도 양주시 유양동 출신이다. 현재 남양주시 지역이다. 임꺽정이 도적이 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백정으로서의 신분 차별도 있었겠지만 당시 명종의 나이가 어려서 수렴청정을 하면서 동생인 윤원형이 권력을 장악하고 부정부패와 전횡을 일삼던 시기였다. 하지만 ‘백정’이라는 신분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마을에 어울리지 않고 떠돌아 다니는 유랑민을 백정이라고 해서 일반 신분으로 취급했고, 그들을 정착시키려고 노력했다. 백정은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화척 등으로 불리었다. 이들은 북방유목민 출신으로 마을에 어울리지 못하고 생활을 해왔다. 그런데 조선시대 세종 때부터 이들을 정착민화 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다만 세종대왕은 이들에게 회유책 등을 사용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왕들은 이들을 정착시키기 위해 강경책을 사용하기도 했다. 여기에 명종 때 와서 수렴청정 등으로 인해 관리들의 부패가 만연하면서 백정들의 설움과 더불어 일반 백성들의 핍박까지 겹치면서 임꺽정 도적떼가 나타난 것이다.

임꺽정의 악행

임꺽정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모아서 황해도 및 함경도를 중심으로 관아와 민간의 재물을 훔쳤다. 1559년 이후 제법 세력이 커지면서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활동을 했다. 임꺽정은 재물을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의적 활동은 없었다. 다만 백성들이 호응하는 이유는 자신들을 괴롭히던 관리들을 혼내줬기 때문이다. 또한 홍길동보다 악행이 덜 했다. 홍길동은 만나는 사람들마다 족족 죽였지만 임꺽정은 자신의 위치나 자신이 왔다 간 것을 알려준 이들만 죽였다. 임꺽정 무리들이 점차 대담해지면서 1560년 한양까지 출몰했다. 그러면서 왕실에서는 이제 도적이 아니라 ‘국적(國賊)’으로 취급했다. 그러면서 토벌 명령이 내려졌다.

서림의 체포로

이제 토포사를 계속해서 보냈지만 임꺽정은 잡히지 않았다. 그러던 중 1560년 11월 24일 임꺽정의 참모인 서림이 붙잡히면서 단서가 잡히기 시작했다. 서림은 임꺽정과 도적떼의 사정을 낱낱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서림은 관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임꺽정을 추격했다. 결국 임꺽정은 1562년 1월 3일 황해도 서흥에서 군관 곽순수와 홍언성 등에게 사로잡혔다. 다만 일각에서는 진짜로 처형됐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야사에서는 처형을 한 것이 아니라 토벌대의 화살에 맞고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임꺽정은 도적 두목으로 용맹한 사람이었던 것은 맞다. 하지만 의적이었냐를 두고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자신의 행적을 고변하는 자를 잡아서 배를 갈라 버리기도 했기 때문이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한 사관은 임꺽정 같은 도적이 날뛸 수 있었던 것은 나라가 혼란했기 때문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임꺽정이 오늘날과 같은 의적으로 묘사가 됐던 이유는 홍경래의 난과 겹치면서 홍경래 사례가 임꺽정 이야기에 투영됐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