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1월 19일 루이16세 사형 선고 받아

2024-01-19     어기선 기자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793년 1월 19일은 프랑스 루이 16세가 사형 선고를 받은 날이다. 프랑스 대혁명에 의해 왕위에서 내려온 루이 16세는 국민공회라는 새로운 의회가 구성되고 공화제가 선포된 이후 이날 재판이 열렸고, 721명의 투표자 가운데 무죄 334표, 유죄 387표를 받아 유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무죄와 유죄가 비등하게 나왔다는 점에서 루이 16세에 대한 후대의 평가도 엇갈릴 수밖에 없다. 세간에서는 “나는 망했다”는 말을 반복하면서 발버둥치자 사형집행관이 머리에 총구를 들이대며 협박해 단두대로 끌고 올라갔다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기독교수련으로 단련된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왕으로서의 당당함을 잃지 않은 채 꿋꿋하고 냉정하게 모든 절차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사진=픽사베이

구시대 유물 청산 못한 죄

루이 16세를 현대적 의미로 평가를 한다면 구시대 유물을 청산하지 못한 죄가 가장 크다. 사실 루이14세 당시 절대왕조 시대를 열었지만 재정은 그야말로 파탄에 이르렀다. 전제군주제의 가장 큰 폐단은 자기 과시를 위해 재정을 낭비하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유산으로 물려주는 것은 ‘빚더미’이다. 전제군주제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왕가를 존속시키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빚더미 유산은 당시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루이16세가 집권하는 동안 많은 전쟁에 개입을 했다는 점이다. 특히 미국 독립전쟁에 개입을 했던 것이 패착이다. 그로 인해 재정은 더욱 힘들어졌다.

대지주·귀족 제압 못한 죄

미국 독립전쟁으로 인해 재정이 파탄이 나더라도 이를 개혁하기 위해 대지주·귀족들을 제압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으로 보인다. 루이16세는 루이14세와 루이15세를 거치면서 절대왕권을 물려받았다. 절대왕권을 물려받았다는 것은 왕의 군대로 대지주와 귀족들을 제압할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재정을 확보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루이16세는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 예컨대 교회 재산을 압류하거나 대지주의 토지를 빼앗아 버리는 등의 행위를 하지 않고 오히려 대지주나 귀족들과 손을 잡았다. 대신 신흥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민사회계층인 부르주아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사실 부르주아는 언제든지 왕실과 손을 잡을 준비가 돼있었다. 그것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도 왕정 국가로 복귀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은 대지주나 귀족들을 제압한다면 왕과도 손을 잡을 준비가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루이16세는 대지주·귀족과 손을 잡고 부르주아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루이16세가 단두대에 올라가야 할 죄목이 된 것이다.
사진=픽사베이

외국 군대 끌어들여

더욱이 루이16세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외국 군대인 오스트리아 군대를 끌어들였다. 지금의 관점에서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외국 군대를 끌어들이는 것에 대해 용납을 하지 못하지만 그 당시에는 왕들 입장에서는 당연했다. 더욱이 왕실과 왕실의 혼인 정책 등으로 혈연 관계로 맺어졌기 때문에 남의 나라 군대가 주둔하는 것은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시민사회계급은 이미 민족주의가 싹트기 시작했다. 시민사회계급 입장에서 본다면 루이16세가 오스트리아 군대를 끌어들이는 것에 대해 용납하지 못할 일이었다. 만약 루이16세를 계속 살려둔다면 오스트리아 군대는 프랑스로 계속해서 진격할 것으로 예상된다. 루이16세가 단두대에 올라갈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루이16세가 이 세상에 사라져야 오스트리아 군대가 프랑스로 쳐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