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판목운하 그리고 대동법

2024-01-25     어기선 기자
사진=픽사베이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조선시대 인조는 천수만과 서해를 잇는 운하공사를 시작했다. 그것이 ‘판목운하’이다. 판목운하는 인조임금의 재위시절인 1623년 ~ 1649년까지 29년 동안 이뤄졌다. 조선시대 가장 큰 개혁이라고 하면 ‘대동법’을 꼽는다. 하지만 대동법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도 ‘판목운하’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닷길을 만들면서 ‘안면도’를 오늘날 섬으로 만들어 버린 대공사였다. 그 기나긴 토목공사로 인해 당대 백성들은 엄청난 고통을 안아야 했지만 후대에는 대동법으로 상당히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대동법 시행까지 그리고 시행 이후에도

대동법은 선조시대 율곡 이이의 수미법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효종 때 김육의 주도로 1651년 충청도에서 처음 실시됐다. 전국단위로 대동법이 실시된 것은 그 이후 100년이 지나서였다. 처음 제안한 때부터 100년 그리고 전국단위로 시행되기까지 10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는 점에서 대동법이 제안되고 시행될 때까지 그야말로 많은 난관에 부딪혔다. 대동법이 이처럼 시행될 때까지 200여년의 세월이 걸린 것을 두고 기득권인 ‘대지주(五人斗地主)’의 반대 때문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는데 실현 가능성 때문이다. 김육이 충청도에 시행한다고 했을 때에도 산당 등이 반대를 했는데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실현 가능성 때문에 반대를 했다. 그 이후에도 실권을 쥔 세력들은 ‘대동법’의 취지에 대해서 공감한다면서도 실현 가능성에 대해 의문부호를 찍었다. 반대하는 현실적인 이유는 ‘교통수단’ 때문이다. 한반도는 산악지대로 돼있기 때문에 쌀을 육로로 운송할 수 없다. 즉, 조운제도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배의 규모도 커야 하고, 그 뱃길이 안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서해안은 그야말로 다도해이기 때문에 배의 규모를 키울 수도 없고, 뱃길이 안전하다는 보장이 없었다. 하삼도에서 세곡선이 출발한다고 해도 태안반도는 그야말로 험로 중에 험로였다. 해당 지역을 안전하게 지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기득권 세력이 반대한 이유는 대지주였기 때문이 아니라 태안반도의 뱃길 때문이다. 태안반도 뱃길을 정리하지 않으면 현실적으로 대동법을 전국단위로 보급시키는 것이 어렵다.

태안반도에 뱃길 만들어라

인조시대 당시 충청감사 ‘김유’는 조운선의 안전한 항해를 위해 운하를 파야 한다고 제안했다. 육지와 연결된 태안반도의 ‘안면곶’을 시작 부분으로 폭 300m의 딴을 파내고, 돌을 깨서 바닷길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로써 최초 판목운하가 완성됐다. 안면도 내해(內海)인 천수만은 직접 서해로 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판목운하를 통과하게 된다면 200리를 절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안전한 해상통로를 확보할 수 있게 됐다. 사실 해당 지역은 고려시대부터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운항하는 조운선들이 난파되는 장소였다. 이로 인해 매년 수백척, 그리고 수만석의 쌀과 수천명이 사망했다. 이로 인해 세종대왕 때에는 아예 조운선의 운항을 금한 적도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지금도 태안반도 앞바다에서는 난파선 보물이 출토될 정도이다. 그런데 인조 때 판목운하가 완성되면서 조운이 보다 안전하게 됐다. 그로 인해 대동법 시행이 전국단위로 퍼져나갈 수 있는 현실적인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