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1월 30일 찰스1세 사형

2024-01-30     어기선 기자
안토니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649년 1월 30일은 영국 국왕 찰스1세가 사형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날이다. 사실 그 이전까지 ‘민권사상’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다. 그러나 찰스1세 때 왕권과 의회권력이 충돌을 했고, 그것이 결국 내전으로 이어지면서 찰스1세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러면서 민권주의가 싹트기 시작했고, 오늘날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됐다. 또한 영국 국왕은 ‘군림은 하되 통치는 하지 않는다’는 인식을 열게 해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엘리자베스1세·제임스 1세 뒤 이어

엘리자베스 1세 다음으로 제임스 1세가 왕위에 올랐고, 그 뒤를 이은 왕이 찰스1세다. 튜더 왕조 초기 시절인 헨리 7세 시절 대부분의 귀족들이 장미전쟁으로 몰락하면서 절대왕정 시대를 누렸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1세 시기에 대외 팽창과 전쟁 등으로 재정적 수요가 폭증을 했다. 그것을 충당하는 방법은 귀족들에게 손을 벌려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왕권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엘리자베스 1세가 고안한 것은 신흥 귀족인 젠트리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엘리자베스1세는 왕실 토지를 젠트리에게 팔아넘겼다. 젠트리들은 점차 자신의 정치적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1세와 젠트리는 공동의 목표가 있었다. 그것은 귀족들의 권위를 제압하는 것이었다. 제임스1세 역시 강력한 왕권을 원하면서 이를 위해 독자적으로 세금을 걷고 상비군을 두려고 했다. 하지만 의회의 반발이 심하면서 의회를 여러 번 해산시킬 정도로 갈등이 심했다. 이런 상황에서 제임스 1세가 죽자 찰스1세 역시 의회를 무시했다. 찰스1세 역시 의회를 해산하는 것이 여러 차례 있었다.

스코틀랜드 반란으로

여기에 스코틀랜드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제압하기 위해 찰스1세가 의회 승인 없이 독자적으로 스코틀랜드에 진군했지만 결국 스코틀랜드 반군에게 패하게 됐다. 이에 찰스1세는 스코틀랜등와의 전쟁을 위해 특별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1640년 4월 13일 의회를 열었다. 하지만 의회는 찰스1세 요구안을 쳐다보지 않고 다른 특별세를 심의했다. 그러자 불만을 품고 의회를 해산해버렸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반란군이 잉글랜드를 침입하면서 결국 의회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결국 잉글랜드는 왕당파와 의회파로 나뉘어 내전을 하게 됐다. 초반에 의회파가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올리버 크롬웰이었다. 그가 나타나면서 전세가 역전됐다. 결국 찰스1세는 대세가 기울어졌다는 것을 판단해서 스코틀랜드로 도망쳤지만 스코틀랜드는 40만 파운드를 받고 크롬웰에게 찰스 1세를 팔아버린다. 우여곡절 끝에 1649년 1월 30일 찰스1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됐다.

특별히 폭군이나 무능하지 않아

찰스1세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특별히 무능하거나 폭군 이미지는 아니었다. 다만 절대군주였기 때문에 의회를 무시했다는 것이 결국 의회파가 들고 일어나게 만들었다. 영국 백성들 입장에서는 ‘왕’이나 ‘의회’나 그 사람이 그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당시 의회는 오늘날처럼 국민이 투표를 통해 선출하는 집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회 입장에서는 찰스1세를 죽인 ‘이유’를 찾아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영국 백성들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에 크롬웰은 존 밀턴 등을 동원해서 왕권신수설을 부정할 이데올로기를 만들게 했다. 당시 영국 백성들은 왕은 하늘에서 내려준 존재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그런 왕을 의회가 죽였으니 당연히 의회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이것을 깨부수기 위한 이론이 필요햇다. 결국 내놓은 것이 바로 ‘민권 사상’이다. 권력은 하늘에서 내려준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발전해서 오늘날 민주주의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