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1월 31일 홍경래의 난 발발

2024-01-31     어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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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812년 1월 31일(음력)은 홍경래의 난이 발발한 날이다. 홍경래의 난은 기존의 민란과 성격이 다른 점은 처음으로 계급투쟁의 성격을 가졌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로 농민전쟁이 아닌 계급투쟁의 성격이 강했다. 그것은 향임들의 전쟁이었고, 병력 역시 1천여명에 불과할 정도로 소규모 난이었다. 하지만 홍경래의 난이 향후 영향을 상당히 많이 끼친 ‘민란’이었다.

양반이 사라지고

조선시대 들어오면서 서북지역의 차별이 상당히 심했다. 태조 이성계가 함경도 출신이라는 점과 세종시대 4군6진 개척으로 인해 함경도에 사민정책을 펼친 반면 평안도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면서 점차 유배지로 낙인이 찍히는 등 평안도 일대의 사람들에 대한 차별이 극심했다. 하지만 과거시험에서 합격하는 숫자는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히 많았다. 즉, 정계로 진출할 수 있는 관문 통과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과거시험 통과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중앙정계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줄서기’를 잘해야 했다. 중앙정계에서 평안도 사람들을 중용해야 하는데 중용하지 않았다. 결국 과거시험에 합격을 해도 미관말직을 전전하다 끝내야 했다. 이런 이유로 평안도 사람들의 양반 지위를 지키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이들은 주로 농민이나 상공업자로 전락해야 했다. 홍경래도 과거에 실패하면서 풍수장이로 묘자를 보면서 전국을 떠돌아 다니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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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임이 향권을 장악

다른 지방의 경우 중앙정부에서 벼슬을 했던 사람이 고향으로 내려가서 이른바 향권(鄕權)을 장악해서 지역유지가 되는 경우가 발생했다. 하지만 서북지역 즉 평안도에는 양반이 없다보니 향권을 장악할 사람이 없었다. 여기에 국경선 바로 옆이기 때문에 해당 지역에서 거둬들인 조세를 중앙에 운반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처리를 했다. 이에 향임의 역할이 상당히 컸다. 수령(사또)은 중앙정부에서 내려보낸 관직이고, 수령이 향임을 통제·관리했다. 앞서 언급한대로 다른 지방에는 중앙에서 낙향한 양반이 지역 유지를 하고 있기 때문에 수령이 지역 유지의 말을 들어야 했지만 서북지역은 지역 유지가 없었기 때문에 수령의 권한이 막강했다. 이에 수령은 돈 많은 상인들에게 향임을 강제로 떠넘겼다. 그러면서 강제적으로 돈을 많이 뜯었다. 천시 받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향임이 됐으니 상당히 좋을 법도 했지만 돈을 내고 얻은 관직이니 향임 입장에서도 괴로ᅟᅮᆫ 일이었다. 여기에 청나라로 오가는 사신이 서북 지역을 통과하게 된다면 그에 대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창고를 마련해야 했다. 향임은 어떠한 식으로도 돈을 수령에게 뜯기게 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여기에 서북지역 차별이라는 것과 결합이 되면서 향임과 수령은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난 일으켰지만

결국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는데 이는 다른 지역 민란과는 성격이 다르다. 다른 지역 민란은 주로 농민 봉기였지만 홍경래의 난은 향임이 주도했다. 사실 군권 등은 향임이 갖고 있었기 때문에 홍경래의 난 초창기에는 전투 한 번 벌이지도 않고 무혈입성 해갔다. 하지만 농민들이 호응을 하지 않으면서 군사력이 상당히 적을 수밖에 없었다. 초창기 1천명이 궐기를 했고, 가장 최전성기 때에는 5천 정도였다. 다만 홍경래의 난 초창기에 향임들이 내응을 했지만 그 향임들조차도 배반을 하는 사람들이 속출하면서 홍경래의 군대가 빠르게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향임이 주로 돈 많은 상인들이 받았던 직책이었고, 상인들 역시 머리 계산이 빠른 사람들이기 때문에 홍경래가 거사를 일으켰을 때는 홍경래에 붙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향임들이 속속 결집했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농민들이 호응하지 않았고, 군대도 소규모 군대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간파한 향임들은 홍경래의 난은 곧 진압될 것이라고 판단했고, 이에 빠르게 이탈하면서 관군에 붙었다.

농민의 난과 달리 계급투쟁 성격이

홍경래의 난이 다른 민란과 다른 점은 계급투쟁의 성격이 강했다는 것이다. 농민의 난은 주로 수탈에 못 이겨서 들고 일어난 것이라면 홍경래의 난은 향임이라는 특정 계급이 자신의 계급 해방을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런 이유로 홍경래의 난이 비록 소규모 반란이었지만 조선후기에 상당한 영향을 줬다. 다른 민란과 달리 홍경래의 난이 계급투쟁 성격을 갖다보니 훗날 계급투쟁 관련 민란이 발생할 때마다 홍경래의 난을 자주 언급했다. 하지만 한계는 분명히 있었다. 역성혁명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토지 개혁, 신분개혁, 삼정개혁 등 개혁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농민의 호응이 제대로 없었고, 그로 인해 빠르게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