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2월 1일 경부고속도로 착공

2024-02-01     어기선 기자
사진=한국도로공사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68년 2월 1일은 경부고속도로 착공일이다. 서울 서초구에서 부산광역시 금정구까지 연결되는 우리나라 고속도로이며 ‘국토의 대동맥’이면서 ‘한강의 기적’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경부고속도로가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우리나라의 인구와 물자 이동이 원활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경부고속도로가 갖는 의미가 크다. 하지만 경부고속도로로 인해 지역 편차가 심해지면서 영남 지역은 발전한 반면 호남이 소외가 되면서 논란이 불거지기도 햇다.

철도 중심에서 도로 중심으로

조선시대는 도로가 발전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산악지대가 많아서이다. 구한말 들어서고 일제강점기 때에도 도로 대신 주로 철도를 교통 인프라로 삼은 것 역시 산악지대가 많기 때문에 도로를 뚫는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물론 1950년대까지 고속도로라는 개념을 일부 사람들이 갖고 있었지만 그것은 그림의 떡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자동차는 부유층이 가질 수 있는 사치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50년대 후반부터 국토종합개발계획의 필요성에 의해 정부에서 고속도로에 대한 논의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장면정부가 들어서면서 국토개발5개년 계획을 세우면서 국토건설본부를 설립하면서 고속도로에 대한 계획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미합동조사위원회는 우리나라에는 고속도로는 필요 없다는 용역 결과를 내놓으면서 결국 장면 정부는 철도 예산을 도로 예산보다 3.5배 책정했다. 그리고 박정희 군부가 5.16 군사반란으로 실권을 장악하면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고속도로 건설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1967년 12월 15일 ‘국가기간 고속도로 건설 계획 조사단’을 발족시켜 본격적인 준비를 했다. 그러나 야당에서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대해 반대했다. 반대하는 이유는 경부고속도로 건설로 인해 지역 편차가 심해질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실제로 경부고속도로가 생기면서 공단이 영남권에 생긴 반면 호남은 평야지대만 있어 지역 발전의 불균형이 이뤄졌다.
경부고속도로

예산안 책정에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이 세워지면서 예산안을 편성해야 했다. 이에 건설부는 650억원을 내놓았다. 육군 공병감실은 490억원, 서울시는 180억원이었고, 현대건설이 380억원을 제시했다. 당시 현대건설이 해외 고속도로 공사 경험이 있으면서 결국 330억원으로 결정됐다. 그러나 실제 비용은 430억원이 들었다. 경부고속도로 공사에 희생된 사람은 공식적으로 77명이지만 비공식적으로 수백명이었다. 이를 위해 충청북도 옥천군 금강휴게소 부근에 위령탑이 있다. 그 이유는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에서 옥천군 청성면 묘금리까지 이어지는 대전공구 70㎞ 구간이 난공사 구간이었고, 특히 가장 악명 높았던 당재터널(現 옥천터널)도 이 근방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당재터널은 난공사 중에 난공사였다. 절암토사로 된 퇴적층인데 발파작업만 하면 토사가 무너져 사람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인근 주민들은 신령이 깃들었던 느티나무를 베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작업자들은 일당의 몇 배를 주겠다고 시공사인 현대건설 측이 제안을 해도 도망쳐다. 결국 현대건설은 흑자를 포기하고 공기를 맞추기 위해 20배나 빨리 굳는데다 튼튼하기까지 한 조강시멘트를 현장에 전격 투입하면서 개통 예정일 이틀 전에 겨우 완공했다. 드라마 등에서는 마치 이명박 전 대통령이 주판을 엎고 공사하자면서 조강시멘트를 쓰자고 제안한 것처럼 비쳐졌는데 실제로 제안한 사람은 당시 현장소장이었던 고려산업개발 양봉웅 회장이었다. 양 회장은 “주판을 엎고 공사를 하자”고 제안했고, 정주영 회장이 과감하게 수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