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청계천

2023-02-13     어기선 기자
사진=연합뉴스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청계천은 한양 천도 이후 우리나라 도시개발의 상징과 같은 존재였다. 조선시대 한양 개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잣대가 됐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청계천은 개발 역사와 함께 한 하천이었다. 청계천을 기준으로 북쪽에 사는 마을을 ‘북촌’이라고 불렀고, 남쪽에 있는 마을을 ‘남촌’이라고 불렀다. 아무래도 북촌은 왕이 기거하는 궁궐이나 광화문 ‘6조’기관과 가깝기 때문에 고관대작이 살았고, 남촌은 그보다 하위 양반 계급이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계천은 북촌이나 남촌이나 모두 중요한 하천이었다.

준설공사는 이어져

북촌이나 남촌 모두 청계천을 중심으로 생활 했기 때문에 오수는 괴어 있어 불결했다. 이에 태종 때부터 계속 준설공사를 했다. 태종 때 박자청에게 개거공사(開渠工事)를 맡겼다.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준설공사를 했지만 영조 때에는 자원한 자들에 국가에서 품삯을 주고 고용한 고공들을 동원해 준설했다. 청계천은 원래 자연하천이었지만 계속 준설 공사를 하면서 직선으로 흐르게 됐고, 그러면서 수표교․오간수교․광교․ 영미교․ 관수교 등 모두 24개의 다리가 차근차근 들어섰다. 일제강점기 때에 ‘개천(開川)’에서 ‘청계천’으로 불리게 되면서 근대적 도시계획의 성격을 띤 대대적인 준설공사가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에도

일제강점기는 1917년부터 청계천 정비를 하려고 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 등으로 인해 이뤄지지 않았다. 1920년대에도 ‘처리되지 않은 현안’ 중 하나가 청계천 정비였다. 1930년대 들어서서 본격적인 도시 계획을 추진하면서 예산 투입을 하려고 했고, 1935년 경성부가 청계천의 지류를 완전 복개, 본류를 일부 복개하여 도로를 확충하고 하수도를 설치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이후 1937년 청계천 본류를 복개하는 방식으로 공사를시작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 개전으로 인해 공사 속도는 느려졌고, 결국 1945년 일제가 패망되면서 자연스럽게 중단됐다.

한국전쟁 이후

청계천 복개 공사는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8년 6월부터 재개됐다. 그리고 1976녀까지 공사가 진행됐고, 1976년 8월 5일 청계고가도로를 개통하면서 복개공사가 완료됐다. 청계고가도로가 생기면서 특이한 물품을 취급하는 상점과 노점상들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청계천 상가는 유명해졌다. 우스개 소리로 청계천을 돌면 탱크를 조립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또한 1970~80년대 초 무렵의 청계천 일대 전자상가는 세운상가와 더불어 전자산업을 선도했었다. 그리고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시장에 있으면서 청계천 복원사업을 해서 오늘날 청계천의 모습을 갖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