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근친혼

2023-02-16     어기선 기자
KBS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왕족들 사이에서 근친혼이 성행했다. 고구려나 백제보다는 신라에서 근친혼이 성행했던 것은 ‘골품제’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려시대의 근친혼은 골품제의 영향이기 보다는 귀족들의 발호를 막기 위한 방편이 더 강했다.

서라벌 중심 부족국가에서

신라시대에 근친혼이 성행했던 이유는 ‘골품제’의 영향 때문이다.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신라가 골품제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서라벌’ 중심 부족국가에서 출발했다는 것이다. 고구려는 부여에서 이탈한 사람들이 세운 국가이고, 백제 역시 고구려에서 이탈한 사람들이 세운 국가인 점과 신라는 출발이 달랐다. 즉, 고구려와 백제에 비하면 폐쇄적인 부족국가에서 출발을 했다. 여기에 신라 초창기에는 박·석·김 등 ‘성씨’가 다른 사람들이 임금으로 등극하면서 더욱 폐쇄적인 부족국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로 서라벌에 사는 ‘김씨’로만 국한해서 임금을 계승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이유로 서라벌에 사는 김씨왕족의 혈통을 잇는 사람들끼리 혼인을 할 수밖에 없으면서 결국 근친혼이 성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근친혼은 통일신라 말기까지 이어졌다. 대표적인 사람이 진성여왕과 위홍 각간의 혼인이다. 숙부와 조카딸의 관계로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이해가 되지 않지만 통일신라 당시 왕실 결혼관으로는 당연한 일이었다.

고려는 다소 다른 양상으로

물론 고려도 근친혼이 성행했다. 하지만 그것은 양상이 좀 다르게 전개됐다. 고려의 출발이 호족연합국가에서 출발을 했기 때문이다. 왕건이 29명의 부인을 뒀다. 하지만 부인들은 결국 호족의 딸들이었다는 점에서 호족연합국가로 출발을 했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 혜종 시대로 접어들면서 호족들끼리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 신경전을 벌이게 됐고, 그것이 왕규의 난 등으로 발현됐다. 광종 입장에서는 더 이상 귀족들의 발호를 막아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되면서 호족들과의 결혼을 더 이상 추진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결국 광종은 대목왕후와 결혼했는데 이복남매 관계였다. 경종과 헌애왕후 역시 사촌간이었다. 다만 명목상 근친혼으로 보이게 하지 않기 위해 공주들은 왕씨가 아니라 외가의 성씨를 따랐다. 대표적으로 천추태후는 왕건의 손녀였지만 왕씨가 아니라 외할머니 가문인 황보씨였다. 고려 왕실에서 태어난 여자는 모두 근친혼을 해야 했다. 그것은 호족들과 결혼할 경우 호족들이 발호하기 때문이다. 다만 고려 중기부터는 왕권이 강해지고 호족들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점차 근친혼보다는 족외혼으로 기울어졌다. 고려말 원간섭기에 들어오고 성리학이 유입되면서 근친혼은 점차 사라지는 분위기가 됐다.

근친혼 금지 그런데 불똥은

조선시대가 성리학의 나라가 되면서 근친혼이 금지됐다. 문제는 본관은 다른데 성(姓)이 같은 동성이본까지 금혼령이 내려졌다. 여기에 성(姓) 다르더라도 본관이 같으면 결혼하지 않는 이성동본 금혼령까지 내려졌다. 현대까지 내려온 것은 동성동본이고, 2000년대 들어서야 폐지됐다. 그것은 조선시대 때 부계성(姓)을 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전학적으로 볼 때 동성동본 금혼령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즉, 악법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