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통한 과거리뷰] 은마아파트

2024-02-17     어기선 기자
사진=연합뉴스
[파이내셜리뷰=어기선 기자] 서울 대치동 은마아파트 재건축 일반분양가가 평당 7천700만원으로 추산됐다. 금액은 재건축 단지 중 역대 최고 분양가를 기록한 반포 래미안원베일리(약 5천669만원)를 웃도는 수치다. 은마아파트 추정 종전가액은 76㎡가 19억원, 84㎡는 22억원으로 나왔다. 종전가액은 현재 가치만 놓고 감정평가한 금액이다. 76㎡ 소유주가 84㎡를 분양받으면 4억여원이 필요하다. 109㎡를 분양받으면 최대 7억7000만원가량을 더 부담해야 한다. 분담금 액수는 바뀔 수 있다. 서울시는 ‘은마아파트 재건축 사업 정비계획 결정 및 정비구역 지정안’에서 은마아파트 일대 24만3552㎡를 정비구역으로 지정하고 지구단위계획 지형도면 등을 확정 고시했다. 고시에 따르면 은마아파트는 28개 동, 4424가구에서 33개 동, 5778가구 규모로 재건축된다.

논밭에 올린 아파트

은마아파트는 1963년 경기도 광주군에서 서울로 편입됐다. 그리고 1967년 본격적인 강남 개발이 시작되면서 은마아파트도 개발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해당 부지는 원래 비만 오면 물이 고였던 저습지라서 건설회사들이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한보주택이 헐값에 사들여 주거용지로 변경하면서 당시 민간 건설사업 규모 중 대규모 단지인 4천424세대에 달하는 은마아파트를 건설했다. 건설 당시 영동5로(현 삼성로), 영동6로(현 영동대로), 남부순환로 등 큰 도로만 있을 뿐이었고, 큰 도로 주변에는 논밭만 있었다. 여기에 부동산 규제 등으로 인해 초창기 분양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로 인해 한보는 자금난을 겪으면서 도산 직전까지 갔었다. 그러나 2차 오일쇼크로 부동산이 안전자산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부동산 붐이 일어났다. 이에 20일만에 분양이 완료됐다. 이로 인해 한보는 현찰을 많이 보유한 건설사가 되면서 대기업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치동 교육의 산실

은마아파트는 8학군의 산실이 됐다. 그 이유는 경기고등학교, 휘문고등학교, 중동고등학교, 수명여자고등학교, 경기여자고등학교 등이 이전했기 때문이다. 서울대 입학률이 높아지면서 그에 따라 8학군이 형성됐고, 이에 학부모들은 은마아파트로 이사를 하는 것이 꿈인 시대가 도래했다. 이로 인해 집값이 천정부지로 올랐다. 물론 당시 고등학생들은 이제 50대가 됐고, 그 학부모들은 노태우 정부 당시 1시 신도시 즉 분당으로 이사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치동 교육의 산실이 되면서 학원가들이 밀집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은마아파트 입주를 원하는 학부모들이 많이 있다.
사진=연합뉴스

낡은 시설에 비좁은 주차장

사실 은마아파트는 건설 당시에는 엄청난 최신식 아파트였지만 지금은 낡은 아파트에 불과하다. 수도, 110V 전기, 열병합 보일러(난방), 엘리베이터 등 그야말로 최신식 아파트였다. 더욱이 아파트에 엘리베이터가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가장 악명이 높았던 것은 바로 주차장이다. 건설 당시 자가용은 부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주차장을 많이 만들지 않았다. 그런데 1980년대 들어서면서 자가용 시대가 도래했고, 1가구에 1대가 아니라 1인 1대로 변경하는 등 자가용은 많이 늘어났는데도 불구하고 주차장이 한정되면서 주민들의 주차난은 그야말로 심각한 수준이 됐다. 은마종합상가는 은마아파트 주민들을 위한 상가였었는데 이제는 유명 맛집들이 많아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특히 은마아파트가 얼마 남지 않은 오래된 아파트이기 때문에 아파트 구경과 함께 맛집 탐방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1996년부터 재건축 추진

은마아파트는 1996년부터 재건축을 추진해왔다. 하지만 재건축이 쉽지 않아서 여러번 좌절을 해야 했다. 재건축 시공사는 2002년 주민총회를 통해 과반을 얻은 삼성물산 - GS건설 컨소시엄이 시공사업단으로 구성돼있다. 여러번 좌절한 이유는 재건축 아파트의 대표격으로 인지도가 널리 알려지면서 부동산 가격 상승을 억제하려는 정부와 서울시가 재건축에 대해 난색을 표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은마종합상가 상가조합원들은 외부에서 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재건축에 들어가는 것에 난색을 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