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차부(車夫)

2023-02-20     어기선 기자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차부(車夫)는 조선시대 존재했던 ‘직업’이었다. 우리나라는 산악지대이기 때문에 우마차의 통행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런 이유로 주로 사람이 주로 물류 운송을 담당했다. 이런 이유로 보부상이 발달했다. 하지만 도심 지역에서는 ‘물류 운송’ 담당할 전문 직업이 필요했다. 이에 조선시대가 개창되면서 나타난 직업이 바로 ‘차부’다. 차부가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택배’라고 할 수 있다. 주로 한양에서 업무를 했고, 우마차를 수단으로 하는 운송업을 담당했다.

죄수가 형장으로 끌려갈 때

구순훈의 ‘이순록’이라는 책에는 ‘용산의 한 차부가 도성 안으로 짐을 운반하고 날이 저물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죄수가 형장으로 끌려갈 때는 용산 차부가 수레로 실어 가는 것이 상례였다’고 기록돼 있다. 우리나라는 산악지대가 70%를 훌쩍 넘는다. 이런 이유로 육로가 제대로 발달하지 않았다. ‘도로’를 개설하고 싶어도 워낙 산악지대가 험악하기 때문에 도로를 개설하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물류 운송은 ‘사람’이 담당했다. 보부상이 전국단위 물류 운송을 담당했다. 하지만 도심지역은 ‘우마차’ 운행이 가능했다. 이런 우마차 운행을 담당했던 전문 직업이 바로 ‘차부’다. 고려 개성(송악)은 왕건 이전 통일신라 시대부터 ‘왕씨집안’이 만든 자연적으로 형성된 도시였다면 ‘한양’은 철저하게 계획도시였다.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할 것을 계획하면서 철저하게 계획도시로 만들었다. 이런 이유로 경복궁을 중심으로 남쪽으로는 6조 관청을 만들었고, 광화문에서 남대문까지 6조 거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종각을 중심으로 6의전이 들어서면서 6의전 거리가 만들었고, 종묘와 사직 등등을 계획하면서 한양 곳곳에 도로가 만들어졌다.

도로 다니는 우마차

송악이나 서라벌 즉 경주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도시였다면 한양은 철저하게 계획된 도시였기 때문에 도로가 비교적 ‘좋은 편’이었다. 이런 이유로 우마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가 만들어졌다. 이런 도로를 통해 물류를 담당한 사람들이 나타났으니 그들이 바로 ‘차부’다. 구순훈이 지은 이순록에는 용산 차부들이 사형수와 그 시신을 이송하는 것으로 소개했다. 다만 차부에 대한 기록은 여러 곳에서 남아있다. 1602년 한성부에 소한 차부는 11명이었는데 그 중 4명은 왕자들이 사적으로 이용하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1739년 발간된 신보수교집록에 한성부 소속 관직이 모두 정리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총융청에 한명, 수어청에 두명의 차부를 공식적으로 뒀다. 차부는 삯을 받고 각종 화물을 운송하기로 했다. 하지만 관급 공사가 있으면 동원되기 일쑤였다. 그들은 목재나 석재 운반을 도맡았다.

정조 때는 대대적으로 고용

정조시대에는 총 646명의 차부를 고용했다. 그 이유는 바로 화성공사 때문이다. 만약 화성공사에 차부가 없었다면 원활히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시대가 원래 농업국가에서 시작했지만 조선후기가 되면서 점차 상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차부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러면서 차부도 운송수단, 동력, 화물의 종류에 따라 점차 구분이 되기 시작했다. 이러면서 우차부와 인력거부로 구분이 됐다. 1906년 지방세 규칙에서 운송사업 분야에, 교자세, 인력거세, 자전거세, 짐수레세 등으로 구분했다. 오늘날 인력거 역시 차부에서 파생된 직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이 구한말 되면서 조합을 설립하고 운송업을 조직화됐다. 그리고 자신들만의 영역을 만들어 점차 전문 기업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오늘날 택배나 배달사업 등으로 발전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