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만주의 조선족

2023-02-23     어기선 기자
사진=연합뉴스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오늘날 만주에 사는 한민족을 ‘조선족’이라고 부른다. 만주는 ‘고조선’ 시대부터 시작해서 부여와 고구려, 발해를 이어오면서 한민족이 지배한 땅이었지만 역사가 점차 흘러가면서 한민족의 영향력을 벗어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 들어서면서 조선은 새로운 변화를 보이면서 그에 따른 한민족의 만주 땅 이주 현상이 발생했고, 그에 따라 오늘날 조선족이 형성됐다. 그들은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중국이 탄생하는 역사적 과정을 거쳤고, 오늘날에는 우리나라와의 상당한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교류를 이어왔다.

지금의 조선족은 발해 이전의 한민족은 아니다

오늘날 조선족은 발해 이전의 한민족과는 다르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로 이어지면서 만주땅을 한민족이 지배를 했지만 발해가 멸망하면서 그들은 고려땅으로 내려와야 했다. 그 이후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계속해서 영토 회복을 위해 끊임없는 북진 정책을 취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 사이 만주땅은 거란족, 여진족, 한족, 몽골족 등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처럼 만주땅이 가장 중요한 요충지가 된 것은 바로 둥베이평원으로 불리는 동북평원 때문이다. 동북평원은 미국, 우크라이나, 아르헨티나와 더불어 4대 평원이라고 할 정도로 토지가 비옥한 땅이었다. 하지만 이 땅을 차지하고 정착한 민족이 없으면서 그동안 수많은 민족들이 발호하고 해당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상당히 피흘리는 역사를 보여왔었다. 그런데 여진족 누리하치가 후금을 건국하고 청나라를 건국했다. 청나라는 명나라를 정복한 후 한족에 동화될 것을 우려해서 청나라 황실은 만주지역을 봉금지역으로 만들었다. 이는 1881년까지 유지됐다.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

그런데 이런 봉금정책에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은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이었다. 청나라 입장에서는 동북지역에 서양오랑캐가 출몰하기 시작하면서 그에 따른 고민을 했고, 결국 조선에 손을 내밀어서 ‘나선정벌’까지 했다. 청나라로서는 단계적으로 봉금 정책을 해제해야 했다. 그러면서 조선 백성들도 만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더욱이 19세기는 세도 정치로 인한 삼정의 문란으로 인해 조선 땅에서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욱 힘들게 됐다. 조선도 만주 진출에 대해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 백성의 만주 이주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은 분위기였다. 대한제국 당시에는 만주지역에 서변계관리사(西邊界监管使)를 파견하는 등 만주지역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다.

사실상 만주지역 지배자로

조선 후기부터 이른바 동북 3성으로 조선 백성들의 이주가 본격화됐다. 그러면서 해당 지역에서 논농사가 시작됐다. 이미 조선 땅에서 모내기 등 논농사 기술을 터득한 백성들이 만주땅에서도 개간을 하면서 논농사를 통해 부를 축적해 나가기 시작했다. 통계에 따르면 1920년대 해당 지역 논 면적의 70%는 조선인이 개간한 것이었다.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했다. 그러면서 조선땅에서 소작농으로 일했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땅을 잃어버리자 만주로 진출을 했다. 그러면서 만주에서 토지를 개간하면서 독립운동의 의지도 불태우기도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은 한족과 다른 민족이라는 의미로 ‘조선족’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그리고 1931년 만주사변으로 인해 ‘위만주국’이 세워지면서 일제의 또 다른 핍박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1945년 일제가 패망하면서 위만주국도 멸망하고 중국 공산당은 동북지역의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이때 조선족 농민들은 국적 문제를 많이 해결했다고 한다. 그들은 중국 공산당 정부가 발급한 토지증을 취득하고 토지의 주인이 됐다. 이런 이유로 조선족들이 중국 공산당을 지지하게 됐고, 소수민족의 지위와 자치주를 승인받는 토대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