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방곡령

2023-02-27     어기선 기자
사진=픽사베이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방곡령은 1876년 조선 개항 이후 1910년 국권침탈까지 약 35년간 100여 차례 발생한 조치이다. 원래 지방관이 자신의 임지에 흉년이 들었을 때 곡식 가격 폭등을 막는 조치인데 곡식의 외부 유출을 막기 위한 것이다. 특히 유명한 것은 1889년 8월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이 일으킨 이른바 ‘방곡령사건’이 가장 유명하고 일본과 역사상 처음으로 불거진 통상마찰이고, 일제의 경제침탈의 시발점과 같은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관찰사 조병식이 일본의 무분별한 쌀 수입으로 인해 함경도민들이 기아에 허덕이자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해 방곡령을 강행하다가 발생한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복잡한 상황과 국제정세까지 얽히면서 그야말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조병식이 내린 방곡령

조병식이 내린 방곡령에 대해서 일본의 무분별한 쌀 수입으로 인해 함경도민들이 기아에 허덕이자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해 방곡령을 강행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또 다른 일각에서는 조병식의 탐관오리 때문이라는 평가도 있다. 조병식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둘째치고라도 일본제국이 방곡령 시행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그것은 1883년 조일통상장정 때문이다. 조선 정부는 일본과 체결한 조일통상장정에 따라 방곡령 개시 1개월 전에 일본에 통보해야 한다. 조병식이 함경도에 방곡령을 내린 것이 1개월 전이었지만 조정에 보고한 후 일본에 직접 통보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면서 지체됐었다. 이에 일본제국이 조선 정부에 항의를 했고, 조정은 조병식에게 방곡령 해제를 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조병식은 조정의 지시를 거부했다.

영국의 거문도 점령

일본이 이렇게 강하게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1895년 거문도 사건 때문이다. 거문도 사건은 러시아의 남하 정책 때문이었다. 게다가 고종은 인아거청(引俄拒淸)을 구사했다. 그것은 러시아를 끌어들여 청나라의 영향력을 줄이는 정책이었다. 왜냐하면 1884년 7월 7일 갑신정변이 발발하자 조선 조정은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갑신정변을 제압했다. 그러자 청나라가 조선 조정에 대해 영향력을 발휘하려고 했고, 이를 막기 위해 조선 조정은 러시아를 끌어들였다. 그런데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던 영국이 거문도를 점거하는 이른바 거문도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제국 입장에서는 자신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 이에 방곡령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제국은 조선 조정에게 강하게 요청했고, 청나라 역시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위기의식을 느끼면서 일본제국의 방곡령 항의를 인정하는 모양새를 보였다. 결국 조병식은 강원도로 쫓겨가게 됐고, 일본에서 요구한 배상금 11만엔은 조병식에게 직접 물도록 지시했으며, 함경도의 방곡령은 해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