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3월 2일 바스쿠 다 가마 함대 모잠비크 섬 방문
2024-03-02 어기선 기자
인도 항로 개척하라
서구 유럽의 최대 화두는 ‘후추’를 비롯한 향신료의 안정적 공급이었다. 향신료는 인도 혹은 동남아시아에서 생산된 이후 아라비아, 이집트, 레만즈 그리고 지중해를 거쳐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수입해서 전유럽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다보니 향신료는 엄청 비쌌기 때문에 귀족들의 사치품이었다. 문제는 오스만제국이 동지중해를 통일하면서 향신료의 가격이 치솟기 시작했다. 스페인이나 포르투칼 등 서유럽에서는 향신료를 구하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가 됐다. 이런 이유로 향신료 ‘직거래’를 생각하게 됐고, 그러면서 두 가지 항로를 유럽 사람들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나는 서쪽으로 계속 항해를 하다보면 ‘인도’를 만날 것이라는 생각과 아프리카를 돌아서 인도로 가는 방법이었다. 포르투칼 엔히크 왕자는 바스쿠 다가마를 제독으로 삼고 1497년 4척의 범선과 170여명의 선원으로 이뤄진 함대를 아프리카로 출발시켰다. 그리고 1498년 5월 인도 캘리컷항에 도착하면서 이노로 가는 동방항로를 개척하게 됐다.모잠비크에서 받은 수모
그 과정 속에서 1498년 3월 2일 바스쿠 다 가마 함대는 모잠비크 섬을 방문하게 됐다. 모잠비크는 동아프리카 연안 즉 인도양 무역 네트워크의 필수적인 지역이었다. 하지만 아랍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에 바스쿠 다 가마 일행은 무슬림 흉내를 내면서 모잠비크 술탄을 만났다. 하지만 술탄은 그들이 내놓은 물건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무슬림인지 아닌지에 대해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결국 모잠비크를 도망치듯이 빠져 나왔는데 그 과정에서 공격을 받아 수송선을 잃어버렸다.캘리컷항에서의 수모
모잠비크에서 수모를 받았던 바스쿠 다 가마 일행은 그해 5월 인도 캘리컷항에 도착했고, 그 지역 술탄을 만났지만 바스쿠 다 가마 일행이 내놓은 물건에 대해 술탄은 역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여기에 아랍상인들의 적대감이 상당했다. 그러다보니 바스크 다 가마 일행은 신변의 위협을 느낄 정도가 되면서 결국 귀국길에 올라야 했다. 다만 캘리컷항에서 구입한 향신료가 대박을 터뜨리면서 투자원금의 60배에 달하는 배당금을 받았다.피의 원정 시작
1차 원정이 비록 60배 넘는 배당금을 받았다고 했지만 바스쿠 다 가마의 입장에서 1차 원정의 치욕은 결국 2차 원정부터 성격을 달리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학살을 자행했다. 인도양을 항해하는 상선들 입장에서 바스쿠 다 가마 함대는 더 이상 원정 함대가 아니라 해적 함대였다. 그것은 유럽에서 생산한 물품이 인도 지역에서는 더 이상 교역 물품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약탈로서 물품을 확보하는 것 이외에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물건 품질 수준이 유럽산은 조악하기 그지 없었던 반면 인도산 물품은 상당한 고가에 팔렸다는 점에서 인도 캘리컷 술탄의 입장에서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