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3월 3일 로드니 킹 사건 발생
2024-03-03 어기선 기자
우연히 찍힌 비디오 카메라에
훗날 킹은 강도, 폭행, 절도 등의 범죄를 저지르고, 가석방 된 상태였기 때문에 과속으로 잡힐 경우 가석방 조건에 걸려 도로 수감돼야 했기 때문에 거칠게 행동했다고 밝혔다. 폭행 1년 후 재판에서는 경찰의 구타는 적법했다고 판결했다. 다만 마지막 6번의 폭행만 인정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피투성이가 된 킹이 그대로 경찰서에 끌려가는 장면을 인근 주민이 비디오로 찍어 방송사에 제보를 하게 된다. 결국 3월 15일 킹을 구타한 경찰관 4명은 기소됐고, 7월 9일 경찰위원회가 과잉폭력 인정 보고서를 발표했다. 해를 넘긴 1992년 2월 5일 재판이 시작되면서 법원은 배심원에 흑인을 한 명도 배치하지 않고 백임 배심원들만 참여하게 했다. 그리고 4월 29일 판결에서 경찰관 4명 중 3명은 무죄, 1명은 재심 결정을 내렸다. 무죄 판결 소식에 로스앤젤레스에서 거주하는 흑인들이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점차 폭동으로 변해갔다.LA 한인타운으로 불똥
문제는 LA 한인타운으로 그 불똥이 튀어졌다는 것이다. 폭동이 일어난 지점과 코리아타운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당시 경찰은 폭동을 막기 위해 백인 거주 지역으로 가는 길을 원천 차단했지만 한인 지역으로 가는 길은 그대로 열어놓았다. 따라서 흑인들이 한인지역으로 몰려갈 수밖에 없었다. 흑백갈등으로 시작됐지만 유색인종 간의 갈등으로 번지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한미 간의 외교관계도 악화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입은 한인 사회의 피해는 엄청나다. 점포 2천300여곳이 손실됐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방정부는 물론 연방정부로부터 보상을 받지 못했다. 다만 자경단의 활동이 돋보였다. 루프 코리안(Roof Korean)으로 불리우는데 한인 사회가 스스로 무장을 한 채 옥상 등에서 흑인 폭도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방어진을 만들었던 것에서 유래했다. 이들은 우리나라에서 살다가 LA로 넘어간 사람들이기 때문에 20대 당시 군 복무를 했던 사람들이다. 따라서 총기를 다룰 줄 알았다. 이런 이유로 스스로 무장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점포가 손실된 것은 초반의 일이고 후반으로 갈수록 점차 안정화된 분위기를 보였고, 주정부에서도 군대를 보내고 경찰을 보내면서 안정화됐다.LA 폭동 이후
LA 폭동 이후 한인사회도 자성을 하게 되면서 흑인들과 잘 지내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하기에 이르렀다. 흑인 사회와 한인 사회의 교류가 점차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당시 결국 한인이나 흑인이나 인종차별의 희생양이었다는 점에서 점차 공감대를 형성했다. 왜냐하면 당시 언론들은 흑인 갈등의 원인은 한인사회 때문이라는 식의 언론 플레이를 했었기 때문이다. 한인이 LA에 들어오면서 흑인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갔다는 식의 언론 보도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