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통한 과거리뷰] 삼전도 굴욕
2024-03-06 어기선 기자
삼전도 굴욕이란
삼전도 굴욕이란 1637년(인조 15년) 청나라가 병자호란을 일으키고 한양으로 빠르게 진격하려고 하자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청나라 군대에 막혀서 강화도로 갈 수 없게 되면서 남한산성으로 피신을 했다. 항전의 의지를 불태웠지만 성내 물자가 떨어지면서 청나라와 강화를 맺었다. 이를 삼전도 굴욕이라고 부른다. 삼전도는 현재의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 및 석촌동 부근에 있던 하중도의 나루터를 말한다. 삼전도 굴욕은 조선왕조 최대의 굴욕으로 취급됐다. 오랑캐에게 머리를 박고 항복을 했기 때문이다.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
인조는 이때 3번 무릎을 꿇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했다. 명나라식 예법은 오배삼고지례(五拜三叩之禮)이다. 많은 사람들이 삼궤구고두례를 했을 당시 인조의 이마가 땅바닥에 찧으면서 피가 났다고 오해를 하고 있는데 역사적 사료는 없다. 삼궤구고두례는 청나라식 예법이라는 점에서 치욕적인지 여부는 후대에 와서는 논란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의 등극 장면에서도 ‘삼궤구고두례’가 나온다. 즉 삼궤구고두례는 청나라식 예법이었다는 점에서 그 예법 자체에 대한 치욕보다는 오랑캐에게 항복하고 오랑캐식 예법을 한 것에 대한 치욕을 느꼈다고 해야 정답이다. 청나라 입장에서는 신하가 황제에게 올리는 예법 정도로 취급했을 뿐 패자가 승자에게 올리는 항복 의식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중국 역사 기록에 따르면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이 승자에게 올리는 항복 의식은 이 보다 더 치욕적인 장면이 많다. 촉한의 후주 유선의 항복 장면을 보면 스스로 염을 하고 머리를 풀어헤친 후 관짝을 들고 항복을 하기도 했다. 다만 조선의 입장에서 본다면 오랑캐를 황제로 섬겨야 하기 때문에 치욕스럽다고 할 수 있다.삼전도 굴욕 이후
삼전도 굴욕 이후 조선은 청나라와 조공책봉관계를 맺게 되면서 조공물을 해마다 보내야 했다. 이는 명나라와의 관계 단절을 의미하며 외교권을 제한 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의정부 세 정승과 6판서의 질자들이 잡혀가고, 삼학사는 패전의 책임을 물어 처형됐다. 이후 조선은 청의 연호와 책력을 채택해야 했다. 인조는 청 연호를 사용하지 않는 신하들을 파직하거나 상소문을 접수하지 않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