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강화 천도 그리고 간척사업

2024-03-08     어기선 기자
강화도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인천 강화도는 고려시대는 천혜의 요새였다. 이런 이유로 여몽항쟁기에 고려왕조는 강화도로 천도를 해서 몽골 군대에 저항을 했다. 문제는 당시 강화도가 지금의 강화도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여몽항쟁기에 간척사업이 이뤄졌다.

강화는 가히 난을 피할 만합니다

몽골이 쳐들어오자 황해도 풍덕군(지금의 개풍군) 승천부 부사 윤린이 “강화는 가히 난을 피할만 합니다”라고 제안을 했고, 최씨정권의 최우는 강화로 천도를 결심한다. 하지만 태조 왕건 때부터 자리를 잡았던 개경(송악)을 버리고 강화로 천도를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런데 강화로 천도를 한 이유는 단순히 몽골군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다. 강화도는 제주도, 거제도, 진도에 이어 한반도에서 넓이가 넓은 섬이었다. 그만큼 평야가 많아서 백성들을 먹여 살리는데 가장 좋았다. 아울러 조운선을 통해 삼남지방의 세곡을 거둬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최씨 정권의 재정을 뒷받침해줄 수 있었다.
강화도

지금의 강화와는 달라

다만 당시 강화는 지금의 강화와 다른 모습을 보였다. 여러 개의 섬으로 나뉘어 있었다. 개경에 있던 백성들이 몰려오면서 이를 간척해서 개경 백성 모두가 살 수 있는 땅으로 만들어야 했다. 궁궐을 짓고 성을 쌓는 것은 물론 바다를 메워 땅을 만드는 간척사업이 벌어졌다. 지금의 강화평야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평야였다. 현재 강화도는 동서 길이 12km, 남북으로 28km를 하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여러 개의 섬으로 이뤄졌다. 이런 곳에 갑작스럽게 개경 백성 수십만명이 몰려왔기 때문에 그야말로 땅이 비좁을 수밖에 없었고, 이에 간척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처가가 맞닿을 정도였고, 그로 인해 강화에 불이 나면 수천호의 집이 불에 탔다’는 기록이 있다.

주요 역사에 등장하는 강화도

강화도는 당시 간척사업에 수많은 백성들이 투입되면서 고통을 받았지만 그 이후부터 풍요의 땅이 됐다. 병자호란 당시에는 인조가 강화도로 천도할 생각을 했지만 청나라 군대가 워낙 빨리 남하를 하면서 강화도로 천도를 하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하면서 결국 삼전도 굴욕을 맛봐야 했다. 그리고 개화기 때에는 강화도 조약을 맺을 정도로 강화도는 우리나라 역사의 중요한 지역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