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3월 17일 정인숙 살해사건

2024-03-17     어기선 기자
당시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70년 3월 17일은 정인숙 살해사건이 발생한 날이다. 제3공화국에서 벌어진 대표적인 의문사 사건 중 하나이다. 해당 사건으로 인해 ‘요정’ 문화가 점차 사라지게 되면서 유흥문화가 룸살롱 문화로 넘어가게 됐다. 그러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우에는 주로 궁정동 안가에서 술을 마시게 됐고,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에 의해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날 무슨 일이

그날밤 11시경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부근 강변3로에서 교통사고를 가장해 총격 암살된 사건이 발생했다. 정인숙은 방송작가와 연인관계였지만 헤어지면서 먹고 살아가야 할 걱정을 하게 되면서 ‘선운각’이라는 요정에서 일을 하게 됐다. 그리고 1960년대 후반에 미혼인 상태에서 아들을 한명 출산했는데 당시 정권 최고위층 자녀라는 소문이 퍼지게 됐다. 또한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정인숙 수첩에는 각계 고위 인사의 이름과 연락처가 기록돼 있었다. 명단에는 재벌 회장은 물론 박종규 당시 대통령 경호실장, 이후락 주일대사,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은 물론 박정희 대통령까지 적혀 있었다. 하지만 애 아빠로 가장 유력하게 거론된 인물은 당시 정일권 국무총리였다. 이로 인해 당시 나훈아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노래를 개사해서 ‘아빠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청와대 미스터 정이라고 말하겠어요’라고 불리었다. 정인숙 아들도 미국에서 자라서 성인이 된 후 한국으로 와서 정일권을 상대로 소송까지 냈다. 하지만 친자확인소송 중간에 정일권이 사망하면서 소송이 유야무야 되면서 아이의 아빠가 누군지 아직도 밝혀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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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정종욱이 범인?

처음에는 오빠 정종욱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하지만 훗날 정족욱은 정부기관에서 나왔다는 사람이 총을 쏜 것이라면서 자신은 총을 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범인이 누구냐는 것은 현재에도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다만 정인숙의 사망사건이 유명해진 것은 단순히 요정의 여종업원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정재계를 휘어잡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각종 소문이 나돌면서 그야말로 제3 공화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고, 아직까지도 방송 프로그램의 단골 메뉴가 될 정도였다.

요정 문화가 사라져

정인숙 사건 이전부터 요정 문화가 사라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계속 나왔다. 요정은 우리나라의 기생 문화와 일본의 접객 문화가 합쳐 만들어졌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부터 모든 일이 요정에서 이뤄졌다. 정치인들 역시 요정에서 정국을 논의했을 정도였다. 이런 이유로 이승만 정권 때부터 요정 문화를 없애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지만 요정 문화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제2 공화국이 들어오면서 대대적으로 요정 문화를 근절시키는 운동이 벌어졌고, 5.16 군사반란으로 실권을 장악한 박정희 세력도 초반에는 요정 문화를 근절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박정희 세력 역시 요정 문화에 빠지게 되면서 요정에서 모든 정책이 이뤄졌다. 그러면서 요정 특히 여종업원들의 경우에는 그야말로 ‘고급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그것이 하나의 무기가 됐다. 그런데 정인숙 사건이 터지면서 일반 사람들도 요정 문화가 무엇인지 접하게 되자 요정 문화를 근절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게 됐다. 그러면서 요정은 점차 사라지게 되면서 룸살롱 문화가 그 자리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의 경우에도 요정 문화 대신 궁정동 안가 등에서 술을 마시는 것을 즐기게 됐고, 그로 인해 10.26 사건이 발생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