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노총각·노처녀
2024-03-20 어기선 기자
IMF 이전에는
노총각·노처녀의 기준이 전환점이 된 시기는 1997년 IMF 외환위기이다. 개화기 전후로 약관의 나이 즉 20세가 넘어가면 남성이나 여성이나 노총각·노처녀 취급을 받았다. 이런 이유로 조선시대에는 노총각·노처녀가 마을에 있으면 국가에서 혼수 용품 지원을 해줬다. 만약 마을에 노총각·노처녀가 존재하면 그 마을의 수령은 마을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것으로 평가받아서 임금으로부터 혼이 나기도 했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면서 점차 노총각·노처녀의 연령 기준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바로 ‘고학력자’의 출현 때문이다. 해방 이전까지만 해도 ‘학교’를 다니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해방이 되면서 점차 교육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부모들은 ‘소를 팔아서’라도 아이의 공부 뒷바라지를 해줬다. 이런 이유로 한국사회의 학력이 점차 높아지기 시작했다. 한국사회의 학력이 높아진다는 것은 결국 사회진출이 점차 늦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농경사회에서는 이미 7세만 돼도 농사일을 돕는 등 노동력을 제공했지만 이제 고학력 사회로 접어들면서 노동력 제공 나이가 점차 높아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군대’라는 것을 무시 못하게 됐다. 즉,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와야 하는 남자들로서는 1990년대 초반이 되자 30살이 되면 노총각 취급을 받았다. 반면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되는 여성은 20대 중반이 넘어가면 슬슬 노처녀 취급을 받았다.IMF가 만들어 놓은 노총각·노처녀의 기준 변화
하지만 IMF 외환위기가 발생하고 난 후 결혼적령기의 기준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남성이나 여성이나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던 시대인만큼 결혼 시기를 점차 늦출 수밖에 없었다. 남성의 경우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온 후 사회에 진출해서 일자리를 잡고, 주택 마련까지 해야 하기 때문에 결혼적령기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반면 여성들의 경우 남성의 결혼적령기가 늦어지면서 덩달아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당시 여성의 경우 결혼을 하면 일자리를 내려놓고 가정과 육아에 집중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따라서 남성의 결혼적령기가 늦어지면서 덩달아 여성의 결혼적령기도 상승하게 된 것이다.부동산 경기 활황
결혼적령기에 대한 또 다른 여파는 2000년대 부동산 경기 붐이 일어나면서이다. 2002년 타워팰리스를 시발점으로 해서 초고층 초고급 아파트가 출현하게 되면서 아파트 가격이 급등하기 시작했다. 아파트 가격의 상승은 미혼남녀에게는 결혼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 이전까지 내집 마련은 사회초년생에게는 ‘가능한 목표설정’이었지만 이때부터 점차 불가능한 목표가 돼버렸다. 내집 마련이 되지 않으면서 결혼적령기는 점차 높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여기에 ‘육아’의 문제까지 겹치게 되면서 비혼주의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성 대결’ 구도 등이 제기되면서 결혼적령기는 더욱 높아지고 있으며, 결혼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다르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