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산미증식계획

2024-03-21     어기선 기자
사진=픽사베이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산미증식계획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부터 1941년까지 일제가 식민지 조선을 식량 및 원료 공급지로 만들기 위해 실시한 농업정책을 말한다. 1941년 이후 태평양전쟁이 터지면서 공출로 변질됐다. 산미증식계획은 명목상 수출과 수입이라는 형태를 보였다. 이런 이유로 식민사학관의 입장에서는 마치 우리나라가 일본과 대등한 관계 속에서 무역을 한 것처럼 비쳐졌다면서 일제가 식민통치를 인간적으로 한 것처럼 묘사를 했다. 하지만 농작물의 거시적인 수출·쉽 정책의 주체는 조선총독부이고, 이를 철저히 일본 본토 중심이었기 때문에 한반도에 거주하는 조선 백성들에게는 긍정적인 영향이 없었다. 명목상으로 쌀 생산량이 급증한 것은 맞지만 목적 자체가 구조적인 수탈이기 때문에 한반도 내 조선 백성들의 생활수준에는 영향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궁핍한 생활을 했다.

안정적인 쌀 수급 원해

일본의 쌀 생산량이 한반도보다 많은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한반도에서 생산된 쌀을 선호했다. 그 이유는 1917년 일본 농촌 인구의 이농현상과 도시집중현상으로 인해 쌀 재고량이 바닥나면서 쌀 소동을 겪게 된다. 이런 이유로 일본 정부로서는 쌀 공급의 안정화가 필요했다. 마침 한반도는 ‘토지조사사업’이 마무리 되면서 농민들은 경작권을 빼앗기게 되면서 ‘지주’와 ‘소작농’으로 재편이 됐다. 소작농은 쌀을 생산해서 지주에게 소작료를 지불하게 됐고, 지주는 소작료로 받은 쌀을 일본에 수출하는 방식으로 부를 축적해 갔다. 즉, 쌀을 생산한 사람은 소작농이지만 일제강점기에 협조한 지주들이나 일본인들이 그 혜택을 입으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노동자들이 열심히 제품을 만들었지만 그 부는 고스란히 자본가가 가져가는 형태였고, 노동자들은 죽도록 일을 해도 그에 따른 부의 축적을 이뤄내지 못하면서 소득의 양극화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사진=픽사베이

우리나라·일본에 악영향 미쳤던 산미증식계획

결과론적으로 산미증식계획은 우리나라와 일본 모두에게 악영향을 미쳤다. 일본은 1차 산미증식계획에서 실패를 하면서 1926년부터 2차 증식계획을 발표하면서 더 많은 생산을 했고, 더 많은 쌀을 유출시켰다. 이는 일본이 1920년대 도시 노동자들이 증가하면서 이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는 인플레이션 관리가 필요했다. 특히 ‘먹을 것’ 즉 쌀 가격의 안정화가 필요했다. 이런 이유로 한반도에서 생산한 쌀을 도시에 공급해서 쌀값을 안정화시킬 필요가 있었고, 더 많은 쌀의 유출을 조선총독부가 독려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한반도에 거주하는 조선백성들의 민생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여기에 돈에 혈안이 된 조선인 지주들이 쌀을 생산하면 할수록 자신의 부를 축적할 수 있기 때문에 소작농들을 더욱 핍박했다. 그렇게 해서 쌀 생산량이 늘어나게 됐고, 그것이 일본으로 유출되면서 일본 도시의 쌀값이 안정화되는 듯했다. 하지만 문제는 일본 농촌의 경제가 무너졌다. 이런 이유로 일본 내 농민들의 집단 반발이 부딪히게 됐다. 일본 농촌의 붕괴는 사회주의사상이 1920년대 일본을 관통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한반도에서는 산미증식계획으로 인해 소장농들의 삶이 무너지게 되면서 점차 반일 정서가 강하게 작용하게 됐다. 이로 인해 신간회가 조직되고,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면서 조선총독부로서는 더 이상 대규모 산미증식계획을 이행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조선 백성들의 삶은

산미증식계획은 식량 총생산량을 늘여 식량자급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지만 ‘식량자급 개선’의 대상은 한반도에 사는 조선백성이 아니라 일본 국민이었다는 점에서 산미증식계획은 우리 백성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다. 물론 식민사관학자들은 이때 쌀 생산량이 증가했기 때문에 우리 백성들이 잘 살았고, 또한 수출 금액도 해마다 증가했기 때문에 우리의 부가 축적된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하지만 그것은 한반도에 거주하는 일본인이나 조선인 지주 등 ‘극소수’에게만 해당된다. 실제로 이때 밥그릇 크기가 급격히 줄어들었다는 점을 살펴볼 때 한반도에 거주하는 조선 백성들의 1인당 쌀 섭취량은 줄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인구의 증가 등을 따지면 쌀 섭취량이 늘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1인당 쌀 섭취량의 문제는 계속 줄어들었다는 점에서 식민사관 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은 허구라고 할 수 있다. 그나마 쌀의 수출·수입 형태의 착취는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공출이라는 형태를 띄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