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준 칼럼] 한국의 저출산 대응 전략: 인구위기 진단과 대책 (상)

2023-03-22     정인준
[파이낸셜리뷰] 2022년 출생아 수 23만9천명(합계출산율 0.78명), 혼인건수 19만1690건은 1970년 관련 통계 조사이래 최저치이며, 2019-2022년(4년간) 출생아 수 감소분(5.5만명) 중 77%가 혼인 감소, 23%가 기혼 부부의 출생아 감소의 영향인 것으로 나타났다. 출산율 하락 요인의 대부분이 안정된 직장, 주택 및 육아·교육비 등 경제적 이유로 결혼을 하지 못하는 혼인 감소인 것으로 나타났는바, 청년 1인 가구가 증가하는 추세에 대응하고 사회 분위기를 가정친화적인 것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젊은 층의 혼인을 제도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다. 제4차 저출산·고령사회기본계획에 근거한 현 정부의 인구정책은 저출산 극복이 아닌 인구감소에 적응하는 정책으로 왕펑 캘리포니아대학 교수를 비롯해 일부 인구 전문가들의 인구감소 낙관론에 근거하고 있다. 즉 인구감소는 경제성장에 따른 불가피한 현상이며, 저출산으로 인구가 감소하면 1인당 교육·복지비가 증가해 1인당 GDP가 높아지고 (사례: 인구가 550만 소국인 싱가포르, 노르웨이의 1인당 GDP는 8-9만$), “삶의 질”이 향상되는 등 인구감소가 재앙이 아닌 축복이라는 것이다. 영국 산업혁명이 진행되던 1780년대에 영국 지도층이 인구증가를 예찬하고, 인류행복을 낙관하던 당시 토마스 맬서스는 유럽 및 아시아 등 각국(지역)의 출산, 사망 및 혼인 통계를 분석한 ‘인구론’(1789)에서 ‘식량의 생산증가 보다 인구의 증가가 빠르기 때문에, 인구과잉이 되면 전쟁·빈곤 및 질병 등 억제요인에 의해 필연적으로 인구가 감소한다.’는 인구증가 비관론을 주장했다. 1760년대에서 1820년대에 영국에서 석탄을 에너지로 시작한 산업혁명에 의해 도시화, 아동 사망률하락, 위생환경개선 및 기대수명 연장 등 에 의해 인구폭발이 일어나고 녹색혁명, 화학비료 등 농업기술 혁신에 의해 식량생산도 급증하면서 맬서스가 예상한 인구증가에 의한 재앙은 일어나지 않았다. 인구증가에 의해 1인당 식량 소비량이 감소하면서 빈곤이 발생하고, 결국 저출산을 통해 인구감소가 초래된다는 맬서스의 과거 인구통계 분석은 정확했으나, 산업혁명 이후 인구증가와 기술진보가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경제성장을 이끌고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한 20세기를 예측하는 데는 실패했다.(지난 200년간 인구는 7배 늘고, 1인당 소득은 14배 증가함). 1950년부터 1973년 까지 선진국 경제는 ‘자본주의의 황금기(golden era of capitalism)’로 불릴 정도로 고도성장을 하고, 한국을 비롯한 개발도상국의 경제발전이 진행되면서 아프리카와 이슬람 국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출산율이 하락하기 시작했다. 선진국에서는 1960년대에, 아시아 개도국에서는 1990년대에 폭락하기 시작한 출산율 하락과 함께 고령화 진행으로 아동층 보다는 노인층이 두터워지는 인구구조 변화가 가속화됐다. 1970-2016년 기간 중 전 세계 평균 합계출산율은 5명에서 2.4명으로 낮아졌으며, 선진국에서는 3명에서 1.7명으로 하락했다. 1960년대 경제발전을 하면서 산아제한 정책을 추진한 한국은 출산율이 4.5명에서 1.18명으로 하락했으며, 2001년 WTO 가입 이후 10년 만에 2010년 2위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중국은 1979년 시행된 1자녀 정책으로 5.7명에서 1.6명으로 하락했다. 서유럽을 모델로 근대화와 산업화를 추진한 일본의 인구는 1872년 3480만에서 1950년 8411만명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했으며, 이후 고도경제성장을 통해 1968년 세계 2위 경제대국(GDP 5조4700억달러)으로 발전하였다. 일본의 합계출산율은 1974년(2.05명) 이후 하락하기 시작해 2005년 최저점(1.26명) 도달 이후 일본 정부의 체계적인 저출산 억제 및 인구감소 대응 전략으로 2013년 1.29명, 2021년 1.34명 등 지난 20년간 합계출산율 1.3-1.4명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의 인구증가는 조선시대 이래 1960년대 까지는 식량자원의 제한과 전쟁과 빈곤에 의해 인구 증가가 억제된다는 맬서스의 인구론이 정확히 적용된다.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된 호구조사(신분, 성명, 남녀, 나이 등)에 따르면 중종 38년(1543년)에 416만 명이던 조선왕조 인구는 인조 17년(1639년) 152만명으로 대폭 줄어들었다. 이는 임진왜란(1592-1598) 기간 중 인적 피해와 더불어 병자호란(1637)에 의해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간 50만명을 포함 인구의 60% 이상이 감소하였음을 보여준다. 두 차례의 외세 침략에 의한 조선의 인구감소는 1347년부터 4년간 걸쳐 중세 유럽에 유행한 흑사병에 의해 유럽 인구의 30%이상이 사망한 인구감소의 층격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1600년대 중반 이후 농업생산이 증가하면서 인구도 급증해 영조 23년(1747년) 조선 인구는 752만 명으로 증가했으나, 이후 기근과 전염병으로 수 십 만명이 사망하면서 영조 41년(1765년)에 697만명으로 감소하였다. 순조13년(1813년) 792만명을 정점으로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해 이후 90년간 670-680만명 수준에서 인구가 정체되었다. 조선 중기 이후 합계출산율은 유럽과 같은 5-6명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출생아 3명 중 2명이 성인이 되기 전 사망하는 다산다사(多産多死) 사회였다. 일본인 관헌이 광무11년(1907년)에 유럽의 인구통계 조사 방식으로 파악한 조선 인구는 978만명으로 1904년 세종왕조실록의 인구 590만명과 약 390만명의 오차가 생긴다. 이는 왕실 세수 징수원인 田政(토지세), 軍政(군역세) 등 삼정(三政)의 문란 속에서 공물과 군역의 대상이 되는 16-59세 남정(男丁)의 호구조사 신고 누락이 원인이다. 1788년 정조 때 호적 등 각종 편찬사업을 담당한 탁지랑(度支郞) 박일원은 호구 조사 누락인원을 30%로 추산했으며, 1910년 조선총독부의 인구조사에 의해 파악된 조선 인구는 1313만명이었다. 19세기에 조선왕조의 인구감소와 식량생산의 부족으로 인해 발생한 백성들의 빈곤한 삶은 36년간 일제 식민지 시대에도 지속됐다. 돌연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이 1961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고 1965년 한일관계를 정상화하면서 한국인들은 빈곤에서 탈출할 기회를 갖게 됐고, 1988년 서울 올림픽대회의 성공적 개최는 빈곤에서 벗어나고 미래로 나아가는 한국인의 ‘창조적 혁신’ 이미지를 상징한다. 한국영화, K-pop 등 한류가 동서양 모두에서 사랑받고 있는바, “서울은 세계로, 세계는 서울로”라는 ‘1988 서울올림픽’의 캠페인이 현실화됐음을 실감케 한다. 한국은 지난 17년간 유럽 국가들의 저출산 대응방안을 인구정책으로 채택, 277조원의 정부예산을 투자해 왔으나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인구절벽 앞 낭떠러지에 있다. 이제 ‘저출산·고령화’는 시대적 과제가 됐고, 한국경제의 재도약을 결정할 것이다. 메모리 반도체 생산 세계 1위를 달성한 한국은 2018년 이래 역사상 처음으로 합계출산율 1명 이하를 기록하고 있는바, 창의적인 ‘저출산과 인구감소’ 해결책을 제시할 선두주자(First mover) 입장이 됐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