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3월 27일 한국프로야구 개막

2024-03-27     어기선 기자
개막식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82년 3월 27일 한국프로야구가 개막됐다. 이날 전두환씨의 시구로 프로야구가 개막됐다. 이날 개막전은 삼성 라이온즈와 MBC 청룡 경기가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렸다. 당시 개막전은 10회말 이종도 선수의 역전 끝내기 만루홈런으로 MBC 청룡이 11:7로 승리했다. 그해 박철순 투수의 활약으로 OB 베어스가 한국시리즈 우승을 했다. 그때 박철순 투수는 22승을 거두면서 전설이 됐다.

고교야구의 전성기

프로야구 이전에는 고고야구가 전성기를 누렸다. 1960년대 후반부터 열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하더니 1970년대에는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면서 경북고 남우식, 경남고 최동원, 부산고 양상문, 광주일고 선동열, 선린상고 박노준 등이 주목을 받았다. 고교야구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면서 프로야구 초창기에는 프로야구보다는 고교야구 시청률이 더 높았다. 이에 고교야구 보도 및 중계를 강제로 줄이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1975년 재미교포 사업가인 홍윤희가 한국을 방문하면서 프로야구 창설 의견을 타진했다. 이에 미국에서 약 20만 달러의 프로화 비용을 마련해서 리그 운영계획서 등등을 작성하는 등 구체화 단계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유신 정부는 경제개발을 해야 한다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이에 홍윤희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때 논의됐던 계획안은 전두환 정권 때 그대로 적용되면서 프로야구 시작을 알렸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한 이후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켜 실권을 장악하자 전두환 정권은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프로스포츠 창설 필요성이 제기됐다. 그것은 국민들이 정치에서 멀어지게 하려는 의도였다. 가장 강력하게 이야기했던 인물은 경남고 출신 이학봉 민정수석비서관이었다. 사석에서도 프로야구 창설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고 박영길 전 감독은 전용이었다. 하지만 한편에서도 우려가 제기되고 있었다. 공개된 장소에서 대규모 사람들이 모인다는 것은 전두환 정권으로서도 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우려였다.
사진=픽사베이

정부 지원금 없이 프로화

이런 가운데 전두환 정권은 프로야구를 프로축구와는 다르게 정부 지원금 없이 프로화를 추진하고 싶어 했다. 이런 이유로 대기업들이 야구단을 하나씩 맡는 방법을 고안했다. 처음에는 그룹 오너의 고향지역이나 그룹이 위치한 곳 혹은 처음 시작한 곳 등 각 그룹에 있어 중요한 지역을 맡긴다는 원칙을 내세웠다. 그것은 그룹 회장들의 애향심을 이용하려고 했던 것이다.하지만 MBC, 삼성, 롯데 등을 제외하고 나머지 기업들은 연고지와 프로야구 등 생소한 사업에 진출한다는 불안감과 부담감 때문에 대부분 고사했다. 이로 인해 프로야구가 좌초될 위기에 놓여 있었는데 느닷없이 삼미가 프로야구에 참여한다고 선언했다. 삼미가 프로야구에 참여하면서 ‘인천’이라는 연고지의 프로야구팀이 창단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됐다. 문제는 호남이었다. 호남은 광주고속(현 금호고속)을 제외하고 내세울 소비재 그룹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해태제과에서 갑작스럽게 연락을 취했다. 호남지역에서 창단을 자신들이 맡고 싶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야구 관계자들은 해태가 기업 규모가 작아서 고려하지 않았다. 그런데 해테제과 스스로 야구단 창단을 타진해오면서 해태가 호남을 기반으로 한 야구단 창단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롯데가 반발을 했다. 동종업계 회사의 참여를 배제시킨다는 원칙을 위배했다면서 반발한 것이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연고지 등을 대기업들이 배정받으면서 프로야구 창단의 박차를 가하게 됐다. 그리고 전두환에게 보고를 했는데 전두환이 했던 말이 “어, 뭐야. 야구야?”였다. 전두환 자신은 프로축구 창단을 하는줄 알았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1982년 3월 27일 전두환의 시구와 함께 프로야구 개막전이 열렸고, 그해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OB 베어스가 우승을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