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3월 28일 김옥균 피살
2024-03-28 어기선 기자
동방의 불란서가 돼야 한다
김옥균은 “일본이 동방의 영국 노릇을 하려고 하니 우리 조선은 적어도 동방의 불란서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임오군란 이후 3차 수신사 일행으로 김옥균은 일본을 다녀왔다. 이에 후쿠자와 유키치 등의 계몽운동에 감명을 받았고, 급진 개화파로 성장하게 됐다. 이에 일본 정부로부터 300만원 차관을 받아 주일 프랑스 공사관을 통해 용병을 교섭하려고 했지만 차관 교섭 자체가 실패했다. 그러면서 민씨 정권의 탄압을 받게 된다. 그러자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서광범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고, 개혁을 단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청나라 위안스카이 군대가 창덕궁으로 몰아쳤고, 일본군은 결국 철수하게 되면서 김옥균은 망명 생활을 하게 된다.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중 김옥균은 1894년 주일 청국 공사 이경방의 설득에 넘어가 청나라로 건너가서 한중일 세 나라가 힘을 합쳐 서양의 침략을 맞서자는 삼화주의를 설파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해 3월 28일 홍종우에 의해 암살당했다.친일파였나
김옥균은 급진개화파인 것은 맞다. 그리고 일본을 이용해서 조선을 개화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평가가 엇갈린다. 한때는 친일파라는 딱지가 덧씌워지기도 했다. 무엇보다 김옥균의 유지를 이어받은 독립협회에서 이완용 등 친일파가 나왔다는 점에서 김옥균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이 많이 있다. 다만 독립협회 인사들 중에는 이상재, 남궁억 등 독립운동가들도 있기 때문에 마냥 비판을 할 수도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갑신정변에서 일본을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친일파였냐는 비판에 대해서도 일본을 끌어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조선을 동양의 불란서로 만들겠다고 한 의지를 볼 때는 일본을 이용했을 뿐이지 일본에 마냥 기대려고 했던 것은 아니라는 평가도 나온다. 즉, ‘친일’보다는 ‘용일(用日)’에 가깝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피살 직전에 청나라로 넘어가서 청나라와 교섭을 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조선의 근대화’에 일본이냐 청나라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