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노예해방 그리고 린치
2024-03-29 어기선 기자
린치법 제정
린치법은 1774년 버지니아주 치안판사인 찰스 린치가 ‘불가피한 상황을 해결하고자, 범죄 용의자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법에 의한 절차를 생략하고 바로 처형’할 수 있는 사형법을 만들었다. 이것을 린치법이라고 부른다. 전통적으로 목에 밧줄을 걸어 사형시키는 교수형이 사용됐고, 거리에 모인 사람들에 의해 강제로 목을 매달아 죽이는 공개적인 처형 방법이었다. 원래는 독립운동 과정 속에서 마을의 결속을 다져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린치법이 허용됐다. 그것은 자력구제와도 연결됐다. 식민지 시기 미국은 연방정부의 권한이 마을 곳곳에 미치지 못하게 되면서 마을에서 자력구제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이에 린치법이 도입된 것이다.남북전쟁 이후 흑인에게 가해진 린치
그러나 남북전쟁 이후 흑인에게 가하는 린치의 형태로 변질됐다. 그것은 노예해방에 따른 후폭풍이었다. 미국 민간기구 ‘평등정의구상’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1865년~1876년 6천500여건의 흑인 린치 자료를 보유하고 있다. 해당 보고서에는 흑인 린치가 남부지방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미국 전역에서 이뤄졌다. 특히 34건의 대형 집단린치 사건도 기록돼 있는데 루이지애나주 오펄루서스에서는 1868년 선거에 참여하려 했다는 이유로 약 200명의 흑인이 며칠에 걸쳐 살해됐다. 문제는 이 시기를 ‘재건시대’(1865~1877)라고 부른다. 당시 남부 지역에 사회질서 유지라는 명분으로 북부 군이 주둔을 하게 됐다. 그리고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령’에 이어 수정헌법 13조가 승인됐다. 공식적으로 노예 제도는 폐지하고, 범죄자를 제외한 비자발적인 예속을 금지시킨다는 것이다. 그러자 백인들은 ‘흑인들로부터 마을의 보안을 책임진다’는 명분 아래 자경단을 조직했다. 그 중에는 폭력단체로 변질되면서 흑인에 대한 폭력이 이어졌다. 다만 연방정부의 개입으로 활동이 소극적이었다. 문제는 링컨의 사후 정권이 교체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곧바로 흑인에 대한 린치가 시작된 것이다.흑인은 더 이상 누구의 소유도 아니야
백인우월주의자의 입장에서 흑인은 이제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과거 노예제 하에서는 흑인은 노예주(主)의 소유였고, 재산이었기 때문에 린치를 가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재산상의 손해를 끼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흑인은 이제 더 이상 누구의 소유가 되지 않게 되면서 린치를 가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흑인을 죽인다고 해서 재산상의 손해가 발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린치법에 따라 자신의 범죄는 면책이 됐다. 더욱이 미국은 당시 독립한지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에 연방정부나 주정부의 권한이 곳곳에 미치지 못했다. 즉 린치법이 허용된 시기였다. 흑인은 범죄 용의자였고, 불가피한 상황 속에서 즉결처형한 것이 되기 때문에 면책사유에 해당한다는 주장을 했다. 연방정부로서도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광기의 시대가 도래했다. 신문 광고를 통해 린치에 참가할 백인을 보집하고 단체로 흑인을 린치하기도 했다. 일종의 스포츠나 서커스 등으로 인식하기에 이르렀고, 상품화 현상까지 발생했다. 여기에 남부의 경우 흑인 노예가 농장주 입장에서는 ‘재산’이었는데 어느날 노예 해방이 되면서 그 재산이 사라졌다. 그로 인해 분노가 더욱 기승을 부릴 수밖에 없었다. 북부 지역의 경우 남부 지역 흑인들이 해방되면서 공장 등에 남부 흑인들이 유입되면서 자신의 일자리가 점차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까지 겹치게 됐다. 이로 인해 남부와 북부 모두 흑인에 대한 집단 린치가 가해졌다. 물론 남부가 그 강도가 더 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