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3월 30일 시칠리아 만종 사건

2024-03-30     어기선 기자
사진=픽사베이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282년 3월 30일은 시칠리아 만종 사건이 발생한 날이다. 시칠리아 왕국에서 앙주(프랑스) 카페가의 시조 카를루 1세에게 대항해 일어난 반란 사건으로 3천여명의 프랑스인들이 살해당했고, 카를루 1세는 왕국에서 쫓겨났다. 시칠리아 만종 사건은 이탈리아 반도에 신성 로마제국과 앙주 제국을 등에 업은 교황세력이 쇠락하게 만든 사건이기도 하다. 기독교 세력이 약화되면서 그에 따라 고대 그리스 문화로 돌아가자는 르네상스가 시작되는 시발점이 됐다. 또한 시칠리아 만종 사건은 오늘날 마피아의 어원이 되는 사건이기도 하다. 그만큼 서양사에서 시칠리아 만종 사건은 중요한 역사적 변곡점이라고 할 수 있다.

복잡하게 얽혀 있던 이탈리아 반도

13세기 이탈리아 북부는 호엔슈타우펜 왕가가 지배하는 신성로마제국에 속해있었고, 이탈리아 남부는 호엔슈타우펜 왕가가 다스리는 시칠라이 왕국이 지배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교황령이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세력 확장을 꾀하고 있었다. 1250년 프리드리히 2세가 죽고 아들 만프레디가 시칠라이 왕국의 왕위를 물려받았다. 만프레디는 교황령과 화해를 하려고 했지만 교황 우르바노 4세와 후임 교황 클레멘스 4세는 만프레디를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교황은 앙주 백작 샤를에게 시칠리아 왕국의 계승권이 있다고 선언했다. 1266년 베넨벤토 전투에서 앙주 백작 샤를이 만프레디를 전사시키고 시칠리아의 카를루 1세로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카를루는 시칠리아를 식민지처럼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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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에 군사를 보내

이에 시칠리아 주민들의 불만이 높아졌다. 이런 가운데 1282년 3월 30일 팔레르모 주민들이 축제를 벌였는데 시칠리아를 지배하던 프랑스인들은 축제가 위협적인 사태로 번질 우려가 있어 군사를 보냈다. 하지만 시칠리아인들은 그것을 계기 삼아 봉기를 했다. 이때 팔레르모 성령 교회의 저녁 기도의 종소라가 울려퍼졌다고 해서 ‘만종(晩鐘) 사건’이라고 부른다. 그것을 계기로 반란군들은 시칠리아 섬의 대부분을 장악하면서 자신들은 교황에게만 복종하는 자유민이라는 선언을 했다. 그리고 교황 마르티노 4세에게 자유민의 지위를 인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교황은 카를루를 왕위로 복귀시킬 것을 명령했다. 그러자 자유민들은 국왕 페로 3세에게 왕위를 제안했다. 그리고 카를루 군대가 페로가 이끄는 아라곤 군의 습격을 받아 시칠리아를 포기하게 된다.

기독교 세력의 그림자 사라져

시칠리아 만종 사건은 신성로마제국과 앙주제국의 후원을 받은 교황 세력의 쇠락을 의미했다. 이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기독교 세력의 쇠락을 의미한다. 물론 그 자리를 국황 페로 3세 등 스페인 세력이 차지를 했고, 이탈리아는 19세기까지 도시 국가 형태로 분열돼야 했다. 이에 이탈리아 역사가들은 가장 안타까운 사건 중 하나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즉, 통일 이탈리아를 이때 이뤄냈다면 이탈리아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시칠리아 만종 사건으로 인해 기독교 세력의 영향력이 약화되면서 그에 따라 도시 국가의 발달이 이뤄졌고, 이것이 상업국가로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이탈리아가 상업도시국가로 성장하면서 부를 기반으로 해서 르네상스를 이뤘다는 점에서 시칠리아 만종 사건이 마냥 이탈리아에게 악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라는 평가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