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계유정난
2023-04-11 어기선 기자
계유정난, 단순히 난으로 보기에는
계유정난은 관학파가 몰락하고 훈구파가 득세하게 만든 변곡점이었다. 관학파는 조선 태조 시기부터 단종까지 조선통치를 담당했던 관료집단이다. 고려말 신진사대부가 관학파로 된 것이다. 그들은 국가에서 세운 학습 체계를 이용해서 성장했다는 점에서 큰 특징이 있다. 성균관에서 유학을 배우고, 등과를 한 다음 집현전에서 학문을 연구했다. 소위 엘리트 코스를 밟았던 인물들이기 때문에 나라의 경영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했고, 어떤 식으로 통치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을 했다. 물론 조선을 개창하면서 공신들이 있었고, 그들 공신들에게는 ‘공신전’이 지급됐다. 하지만 고신전은 철저하게 통제를 해왔었다. 그렇기 때문에 관학파 상당수는 과전법 체제에서 토지를 받아 먹고 살았다. ‘공신’과 ‘관료’는 별개로 취급했었던 것이다. 더욱이 세종 때에는 공신전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통제를 하면서 공신전이 늘어나는 것을 철저하게 막아냈었다. 그것은 공신들이 나라의 중심이 돼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계유정난으로 무너진 토지 시스템
하지만 계유정난이 발생하면서 토지 시스템이 무너졌다. 세조는 계유정난을 통해 집권을 하게 되면서 공신들에게 토지를 나눠주게 됐다. 공신들도 한명회, 신숙주로 대표되는 정난공신파와 이징옥 이시애 난에서 공을 세운 신공신파 등으로 나뉘게 된다. 그리고 세조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 약하기 때문에 이들 공신들에게 공신전을 무분별하게 나눠주게 된다. 물론 기존 과전법이 현직 관리는 물론 전직 관리에게도 분배를 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직전법을 시행하면서 현직 관리에게만 토지를 주게 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공신들이 워낙 많은 토지를 가져갔다는 점에서 국가의 재정은 궁핍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주전호제가 발달하게 된다. 공신들이 워낙 많으니 공신들이 지주가 되고, 지주로서 수조권을 갖게 되면서 농민들을 더욱 핍박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더 이상 나눠줄 땅이 부족해지자 경기도에만 국한했던 것을 전국으로 확대를 하면서 경제 시스템이 붕괴될 수밖에 없었다. 연산군이나 명종 등에서 민란이 자주 발생하거나 도적이 등장하는 이유는 이런 경제 시스템이 붕괴됐기 때문이다. 세종 때 공신을 최대한 억제하고 통제하면서 관료제 사회를 정착시키려고 했지만 그런 관료제 사회가 계유정난으로 인해 붕괴되면서 경제 체제 역시 붕괴되고, 그것이 500년 조선을 이어가게 만들었다. 만약 그때 계유정난이 실패하고 단종이 계속 왕위를 유지했다면 500년 조선은 또 다른 모습이 되지 않았겠냐는 이야기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