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통한 과거리뷰] 쥐 잡기 운동

2024-04-17     어기선 기자
사진=연합뉴스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미국 뉴욕시가 폭증하고 있는 ‘쥐’ 때문에 ‘쥐 박멸 담당자’를 영입했다. 해당 인물은 캐슬린 코라디(34)이다. 그녀가 쥐와 첫 악연은 10세 소녀였을 때이다.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뉴욕주 롱 아일랜드의 철도 옆을 걷던 도중 우연히 쥐의 사체를 발견했다. 이후 코라디는 이웃들에게 ‘철도회사가 쥐 퇴치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내용이 담긴’ 연판장을 돌렸다. 주민들의 서명을 받은 코라디는 연판장을 지역 정치인들에게 전달했고, 결국 철도회사는 쥐를 퇴치했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그녀는 쥐를 없애는데 앞장사면서 쥐의 개체수를 줄여 나갔다. 그리고 이번에는 연봉 15만 5천달러(약 2억원)를 받는 뉴욕시 초대 쥐 박멸 담당자가 됐다.

전국 단위 쥐 잡기 운동 전개

우리나라가 쥐 잡기 운동에 나선 것은 쥐가 먹어 치우는 곡물의 분량 때문이다. 농림부가 추산한 우리나라의 쥐는 9천만리 정도인데 한해 약 240만섬(당시 금액으로 대략 240억원어치)의 분량을 먹어치웠다. 이는 당시 곡물 총생산량의 8%에 육박했다. 가뜩이나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기에 쥐가 곡물생산량 8%를 먹어치우는 것이기 때문에 쥐 잡기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강하게 깔리게 됐다. 우리나라에서 쥐 잡기 운동이 전국단위로 처음 실시된 때는 1970년 1월 26일이었다. 농림부는 예산 1억 4천만원을 들여 전국 540만 가구에 20g의 쥐약을 무료로 배포했다. 그리고 정부는 쥐꼬리를 가져온 학생이나 직장인 그리고 공무원들에게 쥐꼬리 하나 당 연필 한 자루 혹은 복권 한 장을 줬다. 그렇게 해서 1차 쥐 잡기 운동이 성공을 거두면서 그해 5월 15일 2차를 실시했다. 그리고 1971년 3월 15일 3차 전국 쥐잡기를 실시했다. 1972년은 쥐띠해임에도 불구하고 쥐잡기 운동이 열기를 더해지면서 쥐잡기 포스터 공모대회와 쥐 박멸 웅변대회가 열렸다. 하지만 쥐 잡기는 농촌에서는 엄청난 참여도가 있었지만 서울 등 도심에서는 참여도가 낮았다. 그 이유는 음식점이나 유흥가 등에서는 쥐약을 놓는 것을 꺼리게 됐다. 일반 가정집에서도 애완용 가축이 잘못 먹고 죽는 경우가 발생하면서 쥐약 놓기를 기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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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들어서서

이런 전국 단위 쥐 잡기 운동은 1980년대에도 이어졌다. 하지만 쥐꼬리 검사 등은 사라졌고, 1년에 2번 연중행사로 치러졌다. 그런 것이 1990년대 들어서면서 정부 차원에서 쥐잡기 운동이 사라졌다. 급격한 도시화가 아이러니하게도 쥐 개체수의 감소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양곡을 제대로 된 시설에서 철저하게 관리를 했기 때문이다. 또한 도시화로 인해 상하수도 관리를 지자체가 철저하게 하면서 쥐의 개체수가 감소했다. 하지만 아직도 쥐는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