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4월 19일 4.19혁명 발발
2024-04-19 어기선 기자
높은 학구열
1960년은 한국전쟁 휴전 협정을 맺은지 7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대한민국 사회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특히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커졌다. 그것은 의외로 높은 교육열 때문이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이승만 정권은 국가 총예산의 10.5%를 교육 관련 지출로 사용했다.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의무교육제가 실시됐고, 학구열 역시 상당히 높았다. 농촌에서는 소를 팔아 자녀의 등록금을 마련할 정도였다. 이런 이유로 대학을 진리의 상아탑이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부모의 등골탑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이런 이유로 1945년부터 1960년까지 학생수가 3배로 증가하고, 비문해율은 1945년 78%에서 1958년 4.1%까지 떨어졌다. 여기에 이승만 정권은 공산주의를 배척하기 위해 국민학교서부터 민주주의 교육을 실시했다. 민주주의의 정신과 이상에 대한 교육을 시킨 것이다. 대학생도 비약적으로 많아졌다. 1945년 대학생 숫자가 7천여명이었지만 1960년대에는 10만여 명까지 육박했다.도시화와 매스미디어의 발달
한국전쟁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낳기도 했지만 농촌사회가 빠르게 붕괴되고, 도시화가 이뤄졌다. 피난민이 피난을 가게 되면 주로 농촌보다는 도시를 중심으로 피난생활을 했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피난지에서 그냥 생활하게 됐다. 그러다보니 도시화가 급속히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됐다는 것은 그만큼 정보 교류가 활발하게 이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 농촌에서는 정보를 입수하는 것이 한정돼 있었지만 도시민들은 지인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혹은 신문이나 라디오 등을 통해서 정보를 빠르게 입수하고, 빠르게 전달했다. 여기에 언론사들이 활발하게 활동을 했다. 언론인들 상당수가 지식인이었고, 주로 이승만 정부에 대판 비판적인 논조가 강했다. 그러다보니 신문을 접한 도시민들의 경우에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미국 경제 원조 중단 및 실업자 증가
이승만 정권의 가장 큰 문제점이 경제를 미국 경제 원조에 의존했다는 점이다. 이승만 정권이 스스로 경제개발을 추진했어야 했는데 미국 경제 원조에 의존을 하다보니 여러 가지 문제점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1956년부터 잉여농산물을 우리나라에 무상으로 원조했다. 미국에서 남아도는 잉여농산물을 소진시킴으로써 미국 내 농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도 있고, 한국정정부가 원조물자를 팔아서 마련한 돈으로 미국산 무기를 구입하는 계획까지 세웠다. 이승만 정부는 밀가루, 설탕, 면화를 일반 구민이 아닌 기업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팔았다. 이런 이유로 한국제분공업협회, 대한방직협회, 대한제당협회를 결성, 각 협회가 제조업자들에게 분배를 했다. 그렇게 카르텔이 형성되면서 이른바 ‘삼백산업’이 성장하게 됐고, 제조업자들은 막대한 이익을 얻게 됐다. 문제는 미국이 갑자기 원조 방식을 바꾸게 된 것이다. 무상 원조를 축소하고 개발 차관 기금을 형성해 유상 차관 정책으로 전환하려고 한 것이다. 기업들 입장에서 거의 무상으로 원료를 공급받았다가 어느날 갑자기 비싼 돈을 주고 원료를 구입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 삼백산업은 전반적인 침체기를 겪으면서 이승만 정부의 경제성장률도 침체에 이르게 됐다. 그것은 실업자의 대량 발생으로 이어졌다. 대학생들이 비약적으로 많아졌지만 그들이 일을 할 수 있는 일자리가 없게 된 것이다. 결국 이승만 정권은 이런 여러 가지 요인 속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었고, 3.15 부정선거는 방아쇠 역할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