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4월 27일 존 밀튼, 실낙원 10파운드에 저작권 팔다
2024-04-27 어기선 기자
셰익스피어와 견줄만한 문학
실낙원은 셰익스피어와 견줄만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셰익스피어는 창작활동으로 연간 200만 파운드를 벌었다는 점에서 존 밀튼이 그만한 가치를 누리기 충분했다. 하지만 존 밀튼은 44세 실명을 했다. 그리고 52세 반역자로 찍히면서 내리막길을 걷게 됐다. 지독한 가난과 실명으로 인해 존 밀튼은 실낙원을 저렴한 가격에 출판업계에 넘겨야 했다. 1667년 4월 27일 작성된 계약서에는 ‘원고를 넘길 때 5파운드를 지급하며 초판이 매진되면 5파운드를 추가로 내준다. 추가 인쇄에 들어가 2판·3판·4판이 팔릴 때마다 5파운드씩 지급한다’고 명시돼 있다. 오늘날로 보면 상당히 불리하고 불만스런 계약이었지만 당시 작가들은 당연하다는 식의 정상적인 계약이었다고 한다.불리해진 말년 상황
존 밀튼이 실명을 한 것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참수당한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가 귀환하고 왕정복고가 일어났다는 점이다. 존 밀튼은 공화정 이론가였다. 1650년 프랑스 유명 논객이 ‘찰스 1세를 위한 변명’을 출간하자 존 밀튼은 ‘잉글랜드 국민을 위한 변명’을 출간하면서 맞대응했다. 그리고 1652년 ‘잉글랜드 국민을 위한 두 번째 변명’을 써나가던 중 실명했다. 친구들은 집필을 만류했지만 존 밀튼은 계속해서 집필에 매달렸고, 결국 시력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찰스 2세가 귀환하기 두 달 전 ‘자유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한 준비되고 쉬운 길’을 출간했다. 공화정을 부르짖었지만 권력의 무게는 왕당파에게 넘어갔다. 결국 왕당파는 존 밀튼에게 재산을 빼앗고, 자택 감금을 했다. 다만 시력을 상실한 작가는 더 이상 왕당파에게는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런던 대역병과 런던 대화재 발생
여기에 런던대역병이 1665년, 런던대화재가 1666년 발생하면서 출판업계는 그야말로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왕당파가 집권한 시기에 출판업계에게 존 밀튼은 요주의 인물일 수밖에 없었고, 그의 책에 대한 출간을 기피할 수밖에 없었다. 런던대화재로 인해 집을 잃은 존 밀튼으로서는 헐값에 실낙원을 넘겨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이에 5파운드라는 출판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존 밀튼은 이 돈으로 최저생계를 꾸리다가 결국 66세에 사망을 하게 된다. 존 밀튼이 생전에 받은 인세는 10파운드, 유가족이 받은 인세는 8파운드로 총 18파운드를 받았다. 하지만 빅토리아 시대를 거치면서 실낙원에 대해 런던 사람들은 재조명을 하기 시작했고, 오늘날 셰익스피어와 견주어 영국의 대문호 칭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