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5월 9일 이시영,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부통령 사임

2024-05-09     어기선 기자
국민방위군에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51년 5월 9일은 이시영 당시 부통령이 거창양민학살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인해 이승만 정부에 실망해서 부통령직에서 사임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날이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6.25전쟁 중 이승만 정부가 강제징집한 국민방위군 수만명이 고위층의 예산 횡령 및 뇌물 범죄 등으로 인해 보급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희생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최대·최악의 군수비리 사건이다. 한국전쟁에서 전쟁 중에 죽은 병사들보다 국민방위군 사건에 연루돼 굶어죽은 병사가 많았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이에 이시영 부통령은 이승만 정부에 대해 환멸을 느끼면서 부통령직에서 사임을 했다.

막대한 예산 횡령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했던 우리 국군이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9.28 서울수복을 했다. 그러나 중공군이 참전을 하면서 1.4후퇴를 겪어야 했다. 그러면서 우리 국군은 남한 지역 청장년을 국민총동원했다. 당시 서울과 경기 지역 청장년 역시 북한군에 끌려가기보다는 국군에 편입되면 최소한 밥이라도 굶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에 모병에 응하면서 수십만명이 몰렸다. 대략 42만여명이 국민방위군으로 소집됐다. 1.4후퇴로 인해 국민방위군 역시 후퇴를 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됐다. 문제는 사령부의 고급 간부들이 보급품을 부정으로 착복하면서 수많은 장정들이 시걍과 피복을 지급받지 못해 1천여명이 굶어죽거나 얼어 죽었다. 그리고 수만명이 영양실조에 걸려 이후 사망에 이르면서 사망자가 보수적으로 잡아도 9만여명이 됐다. 그러는 동안 고위간부들은 예산을 횡령했다. 예컨대 자동차를 250대 구입했다고 했지만 20대 밖에 사지 않거나 명태를 386만짝을 구입했다고 했지만 4천짝을 구매한 것이 전부였다. 나머지 예산은 자신의 호주머니에 채워진 것이다. 당연히 국민방위군 병사들에게 식량과 피복 등이 전달되지 않았고, 굶어죽거나 얼어죽을 수밖에 없었다. 국민방위군 재정을 담당하던 부사령관 육군 대령 윤익헌은 100여 일 동안 쓴 돈이 무려 3억원이었는데 당시 국가기관이었던 감찰위원회(현 감사원)의 1년 예산이 3천만원이었다.
이시영

폭발한 이시영

국민방위군에서 탈출한 병사들이 속속 문제 제기를 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사회적 공분이 일어났다. 하지만 고위 간부들은 “불순세력에 의해 낭설을 퍼뜨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주자가 워낙 많았기 때문에 국민적 여론은 들끓었다. 결국 수사가 진행됐고 관련자들이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그러나 1951년 5월 6일 1심 재판에서 사령관 김윤근에게는 무죄, 부사령관 윤익헌에게는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했다. 판결 소식을 접한 국민은 분노를 했고, 특히 신성모 국방장관과 김윤근 사령관에 대한 비판 여론이 들끓었다. 결국 그 다음날 이시영 부통령은 이승만 정권에 대한 회의감을 느꼈고, ‘국민에게 전하는 글’을 남기고 부통령직 사퇴서를 제출했다. 이시영 부통령은 “관의 기율이 흐리고 민막(民瘼)이 어지러운 것을 목도하면서도 워낙 무위무능 아니하지 못하게 된 나인지라 속수무책에 수수방관할 따름이니 내 어찌 그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 것인가”라고 통탄했다. 이후 6월 23일 육군참모총장을 정일권에서 이종찬으로 교체됐다. 국방장관도 역시 신성모에서 이기붕으로 바꿨다. 결국 재판을 다시해서 김윤근 사령과 윤익헌 부사령관 등 관련자를 처형시켰다. 이승만 전 대통령을 비호하던 세력들도 국민방위군 사건은 비호할 수 없을 정도로 제1공화국의 흑역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