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5월 16일 신간회 해소
2024-05-16 어기선 기자
1927년 2월 15일 창립
신간회는 1927년 2월 15일 사회주의계, 천도교계, 비타협 민족주의계 등 각계각층이 참여했지만 민족개량주의자들은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았다. 창립총회에서 회장 이상재, 부회장 권동진, 그리고 안재홍, 신석우, 문일평을 비롯한 간사 35명을 선출했다. 그러면서 지회 수 143개, 회원 수 2만명에 달하는 전국적 조직으로 성장했고, 1931년 5월에는 4만 9천여명의 회원이 됐다. 좌우합작이기 때문에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 쟁취, 청소년 운동, 여성운동, 형평운동, 파벌주의·족보주의 배격, 동양척식주식회사 반대, 근검절약운동 등을 내세웠다. 즉, 정치적이면서 이념적인 문제가 아니라 실생활에서의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간 것이다. 신간회가 만들어진 배경에는 1919년 3.1 만세운동으로 인해 만주에서는 무장독립투쟁이, 중국에서는 상해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전개되면서 일본제국주의는 ‘문화정치’를 내세워 민족독립운동의 역량을 분열시키고 약화시키려고 했다. 특히 국내에서는 실력양성운동이 벌어졌는데 일본제국주의 지배하에 두는 것을 목표로 삼으면서 ‘자치운동’으로 전환시키려고 했다. 그 대표적인 선두주자가 ‘이광수’로 이광수가 ‘민족적 경륜’을 통해 자치운동을 내세웠다. 그러자 자치운동을 비난하면서 민족주의계열과 사회주의계열이 자치운동에 대항하는 새로운 세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이에 신간회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광주학생운동 계기로
신간회가 엄청난 회원수를 자랑하면서 명실상부한 독립운동단체로 떠오르면서 조선총독부를 위협했다. 그런데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고 조선총독부는 광주학생운동을 신간회 회원들이 후원했다면서 강제 연행을 했다. 당시 연행된 인물로 조병옥, 허헌 등이었다. 그 이후에도 회원 수는 급증했지만 문제는 지도부였다. 새로 집행위원장이 된 김병로가 자치론자들과 제휴를 모색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지방 조직들이 반발을 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사회주의계열이 극단적으로 치닫기 시작하면서 점차 균열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에 신간회를 해소하고 새로운 단체를 만들 필요가 있다는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결국 1931년 5월 16일 창립대회에서 찬성 43, 반대 3, 기권 30으로 신간회는 해소안을 가결하고, 창립 4년여 만에 사실상의 해체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새로운 조직을 만들려고 했지만 일제 경찰의 강압으로 인해 결국 신간회 후임 단체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신간회는 좌우합작이라는 것으로 국내 독립운동의 한 획을 그었다. 하지만 좌우합작이 남긴 한계가 있었고, 일제의 합법단체였다는 점에서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