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5월 23일 임진왜란 발발

2024-05-23     어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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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592년 5월 23일(음력 4월 13일)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날이다. 임진왜란은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은 물론 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일으킨 7년 전쟁이다. 히데요시의 야욕에 의해 조선 백성들이 상당한 고통을 받았던 전쟁인데 당초 조선은 물론 명나라도 정벌하겠다는 히데요시의 야욕에 대해 왜 전쟁을 일으켰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다. 가장 설득력 있는 가설로는 전국시대가 종료되자 다이묘들의 불만을 바깥으로 돌리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 임진왜란이라는 것이지만 최근 들어서는 ‘쇼군’이 되기 위한 목적이 있었지 않았겠냐는 가설도 있다.

쇼군이 되지 못한 히데요시

히데요시는 쇼군이 되지 못하고 죽었다. 히데요시는 천출이기 때문에 ‘쇼군’ 자리에 오를 수 없었다. 쇼군은 막부에서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하는 사람을 말한다. 즉, 일본 국왕은 허수아비 우두머리이고 일본을 다스리는 실질적인 사람이 ‘쇼군’이었다. 문제는 히데요시는 일본 전역을 통일 했지만 천출이라는 신분 때문에 죽을 때까지 쇼군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관백이라는 직책을 부여받았는데 관백은 일본 국왕을 대신해서 섭정으로 다스리는 사람을 말한다. 막부의 실질적 권한을 갖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즉, 명예관직에 불과했다. 관백 자리는 그 사람이 죽으면 내어놓아야 하고, 후손이 계승하지 못한다. 하지만 쇼군은 대대손손 세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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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츠루마츠 아꼈던 히데요시

히데요시가 아들에게 권력을 넘겨주려고 했던 기록은 곳곳에서도 발견한다. 만약 도요토비 츠루마츠가 일찍 사망하지 않았다면 권력을 츠루마츠에게 넘겨줬을 것으로 파악된다. 대표적으로 츠루마츠가 사망하자 3개월 후 히데요시는 조카인 도요토미 히데츠구를 양자로 삼고, 후계자로 지명하고 관백 자리를 물려주고 후계자 계승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요도도노가 다시 임신을 하고 차남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태어나면서 다시 권력의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인해 히데요리의 앞날도 삐걱 거렸다.

쇼군 얻기 위해 임란 일으켰나

히데요시가 천출 출신이었기 때문에 쇼군이 돼야 했다. 쇼군이 되기 위해서는 다이묘 모두가 납득할만한 업적을 세워야 했다. 그것은 단지 일본 전역을 통일하는 것 이상의 성과를 내야 했다. 이런 이유로 히데요시는 일본 전역을 통일 하기 전에도 계속해서 조선과 명나라 정벌을 이야기했다. 그것은 다이묘들에게 조선땅과 명나라땅을 할해해줄 것이라는 약속이었다. 조선과 명나라를 정벌해 다이묘들에게 그 땅을 할해해주고 ‘쇼군’을 얻겠다는 계산이 깔린 것이다. 히데요시가 정유재란 당시 한반도 남부 영토를 확보하려고 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즉, 하다못해 한반도 남부 영토를 확보해서 다이묘들에게 나눠주고 쇼군이라는 직책을 얻으려고 했다. 그래야만 자신의 아들에게 쇼군 자리를 넘겨주면서 대대손손 자신의 자손이 쇼군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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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요시 사망하자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임진왜란이 끝나자 일본은 그야말로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졌다. 이는 이시다 미츠나리 중심의 서군과 도쿠가오 이에야스 중심의 동군간의 내전이다. 전투 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하면서 도요토미 가문이 몰락하게 된다. 해당 전투가 발생한 이유는 히데요시가 히데요리를 쇼군에 앉히지 못하고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히데요리를 후계자로 삼을 것인지 여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고, 그 논쟁이 결국 전쟁으로 이어진 것이다. 만약 히데요시가 쇼군이 됐다면 세키가하라 전투는 이뤄지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