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명동 백할머니 ‘백희엽’

2023-05-25     어기선 기자
명동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백희엽씨는 우리나라의 전설적인 주식 및 채권 투자자로, 일명 ‘명동 백할머니’로 불리웠던 인물이다. 미래에셋의 박현주 회장이 백씨로부터 주식투자를 배운 것으로도 유명하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 명동 금융업계의 대모로 군림했으며, 영화나 드라마에서 사채업자의 큰손 캐릭터가 나오면 대부분 백씨의 이미지에서 따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여성 사채업차 묘사는 백씨로부터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백씨는 주식 및 채권 투자자의 ‘대모(大母)’였지 사채업의 대모는 아니었다. 따라서 사채업자의 큰손으로 묘사되는 것은 잘못된 묘사라는 지적이 있다.

일본산 페니실린으로 거부

1919년 평양의 부유한 지주의 장녀로 태어난 백씨는 6.25전쟁 중 1.4후퇴 때 전재산을 북한에게 빼앗기고 빈털터리로 월남한다. 부산에서 생계 해결을 위해 양말 장사를 했고, 밑천을 마련했는데 친척의 권유로 밑천을 모두 모아 일본제 페니실린을 매집했다. 마침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일본제 의약품 수입금지 조치를 내리게 됐는데, 일본제 페니실린이 미국제보다 약효가 좋다는 낭설이 돌면서 원가의 10배 이상 판매가 됐다. 이에 5억환의 거부가 됐고, 1950년대 조흥은행이 해당 돈을 예치했다가 주변의 권유로 국채 투자를 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말 본격적으로 주식에 투자

1960년대말에는 본격적으로 주식에 투자를 하면서 증권업계의 전설이 됐다. 특히 동아건설 등 해외건설에 뛰어든 기업들의 주식을 집중적으로 매집했는데 중동 건설 붐이 일어나면서 주식이 폭등하고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엄청난 부를 축적했음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생활 등에는 관심을 갖지 않고 검소한 생활을 고수했다. 이런 이유로 대중매체 등에서 거부의 사채업자가 검소한 생활을 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이 백씨의 검소한 생활 때문이다. 백씨는 1970년대 현 대우증권인 삼보증권 지분을 10% 소유하면서 2대 주주가 됐지만 점심은 짜장면을 먹을 정도로 검소했다. 1970년대 말 고려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이 백씨의 명성을 듣고 그녀의 사무실에 무작정 찾아가서 주식투자를 가르쳐달라고 졸랐고, 허드렛일을 하면서 가치투자의 안목을 배웠다. 백씨가 증권사나 기업체 방문할 때 동행을 하면서 주식투자의 기법 등을 배웠다는 것이다. ‘명동 백할머니’로 불린 이유는 증권거래소와 증권회사들이 모두 명동에 있었고, 백씨가 거액을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