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조선과 명나라의 조공무역

2023-05-31     어기선 기자
사진=픽사베이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조선은 명나라와 조공무역 즉 공무역을 통해서 물물을 교환했다. 조선이 명나라에 사신단을 파견하면 조공물품을 명나라 황실에 바치고, 그에 따른 하사품을 받는 형식으로 물물교환이 이뤄졌다. 이로 인해 명나라는 상당한 골칫거리가 바로 조선과의 조공관계였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명나라가 멸망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임진왜란도 있지만 조선과의 조공관계 때문이라는 말도 나왔다.

조공무역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조선이 명나라와 조공무역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명나라가 해금(海禁, 해상무역금지)와 쇄국정책을 시행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것은 원나라 당시 교초 파동 때문이다. 원나라가 제국을 유자하기 위해 원나라 화폐인 교초를 발행했는데 원나라 말기가 되면서 원나라 황실을 유지하기 위해 교초 발행을 남발했다. 이로 인해 중국 전역의 상권이 크게 위축되고, 피해를 입은 농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결국 홍건적이 될 수밖에 없었고, 명나라 주원장 역시 홍건적 출신이었다. 이런 이유로 주원장은 원시적인 농업사회로 회귀하기를 원했고, 화폐와 상품거래를 금지하기 위해서 해금과 쇄국정책을 고수하게 됐다. 이는 명나라의 정책이 됐다. 물론 후대 황제들 중에는 해금과 쇄국정책을 제한적으로 풀기는 했지만 여전히 해금과 쇄국정책의 기본틀은 유지했다.

교초에 피해 입었던 고려

교초 발행 남발은 고려에도 큰 영향을 끼치면서 큰 혼란기를 겪어야 했고, 결국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조선이 탄생하게 됐다. 그러나 아무리 농업을 기반으로 한 조선의 탄생이 이뤄졌다고 해도 무역을 아예 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이런 이유로 조공을 가장한 공무역이 성사가 됐다. 문제는 조선 특히 양반들 입장에서는 명나라 품목을 수입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 빈번한 조공이 이뤄졌다. 매년 수 차례나 사신단을 명나라에 파견했는데 온갖 빌미를 붙였다. 이것은 명나라 물품을 얻기 위해서이다. 명나라는 五年期一貢이라고 해서 3년에 한번 조공할 것을 요구했지만 조선은 이를 듣지 않고 매년 수 차례 조공 사신단을 명나라에 파견했다. 그리고 사신단은 황제를 알현한 후 수도에서 조선에서 가져온 물품을 시장에 내다팔고, 명나라 물품을 구입했다.

양반만 좋았던 조공

이런 이유로 조공이 조선에서는 물질적 이득을 가져왔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명나라에서 가져온 품목이 주로 사치품이다 보니 백성들과는 전혀 상관 없는 양반들만 좋았다. 이런 이유로 후기 실학자들은 조공무역에 대한 비판이 거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는 조공무역이 결코 굴종적인 외교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