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6월 28일 안창호 체포

2024-06-28     어기선 기자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37년 6월 28일 도산 안창호 선생이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인해 일제에 체포된 날이다. 안창호 선생은 옥고를 치르다가 사망을 했고, 수양동우회는 와해됐다. 이로 인해 국내 최대 독립단체가 사라지게 됐고, 명망 있었던 독립운동가들이 친일로 갈아타게 됐다. 하지만 수양동우회의 명맥을 이어간 것이 여운형의 건국동맹이이었다. 만약 수양동우회가 계속 명맥을 계속 유지했다면 임시정부의 광복군과 연결됐다면 자립으로 독립을 맞이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국내 최대 독립운동 단체

수양동우회는 1926년 수양동맹회와 동우구락부가 안창호가 조직한 흥사단의 국내 조직 격으로 통합해 운영한 단체이다. 안창호를 따르는 서북 지역(평안남도 일대) 지식인들로 구성됐으며 지도이념은 안창호의 무실역행(務實力行)이다. 구성을 살펴보면 안창호의 흥사단, 이광수의 수양동맹회,, 신민회 출신 동우구락부이다. 주요 인물로 이광수와 주요한, 조병옥 등이 있었다. 주로 기독교 출신으로 전문 직업을 가진 지식인이었다. 이런 이유로 부르주아적 사회운동을 추진했다. 따라서 주로 민족개조론 혹은 자치론 등을 내세웠다.

중일전쟁 터지자

수양동우회가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위기를 맞이했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 일제는 지식인과 부르주아 집단을 포섭해서 친일 인사로 만드는 것이 주요 업무가 됐다. 이에 수양동우회가 표적이 됐다. 그러자 수양동우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검거를 했다. 그 과정 속에서 안창호 선생이 검거된 것이다. 옥고를 치르게 됐고,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이미 고문 등의 후유증으로 인해 결국 병사를 하게 됐다.

수양동우회 와해 이후

결국 1937년 수양동우회는 해산됐고, 보유 자금과 토지, 사무기구를 매각하면서 국방헌금으로 납부하게 됐다. 일제가 지식인들을 친일로 전향시키기 위해 만든 대표적인 사건으로 국내 독립운동 단체를 와해시켰다. 그 명맥을 여운형의 건국동맹이 이어가게 됐다. 그리고 수양동우회 지식인 중 일부는 친일로 돌아섰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광수이다. 만약 수양동우회가 와해가 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 독립운동 역사가 다르게 전개됐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