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통한 과거리뷰] 사교육 그리고 고려시대 12공도

2024-06-29     어기선 기자
사진=연합뉴스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윤석열 대통령의 수능 킬러문항 배제 이슈가 이제 학원가의 국세청 세무조사로 번졌다. 지난 28일 국세청은 일제히 학원가 세무조사를 단행했다. 윤석열 정부는 사교육의 뿌리를 뽑겠다고 밝히면서 학원과의 전쟁을 선포한 듯한 모습이다. 우리나라에서 사교육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됐다. 고려시대 12공도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당시에도 국자감 등 관학을 성장시키려고 했지만 결국 사학 12도 즉 12공도가 고려시대에 대유행을 했다.

과거 응시는 누구나

고려시대에 출세를 하기 위해서는 과거시험을 봐야 했다. 고려 광종 당시 중국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의 건의로 과거제도가 실시됐다. 그러면서 국자감, 성균관, 학당, 향교 등 공공교육기관이 설치됐다. 하지만 과거제도는 국학의 학생이 아니라도 누구나 응시할 수 있었다. 고려 초기에는 호족들이 실권을 장악했지만 고려 임금들은 중앙집권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과거시험을 통과한 관료들을 등용하기 시작하면서 이때부터 문벌귀족들이 출현했다. 과거시험을 통해 고위관료가 된 그들은 때로는 과거시험 ‘시험관’이 되기도 했다. 그러면서 문하생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러면서 12공도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고려 문종 당시 과거시험관인 지공거를 역임한 사람들이 12공도를 설립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문하생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고, 거란 등 외적의 침입이 늘어나면서 그에 따라 관학인 국자감의 역할이 축소되면서 그에 따라 12공도의 기능이 더욱 확대됐다. 무엇보다 과거시험에 치중해야 한다는 사회적 풍조가 강하게 작용되면서 사학은 더욱 융성해질 수밖에 없었다.

무신정권 이후

다만 무신정권 이후 문벌귀족이 대규모로 숙청됐고, 무인(武人)들이 실권을 장악하면서 관학은 물론 사학도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즉 과거시험을 통해 관료가 되기보다는 무인과의 연줄이 중요하게 됐다. 그러다가 고려 후기 주자학이 전래되면서 성리학자들은 국학을 크게 진흥해야 한다면서 성균관이 설치됐고, 사학은 약화됐다. 결국 조선시대 들어서면서 초기에는 관학이 크게 융성했지만 수양대군의 계유정난 등의 계기로 집현전 학사들이 대규모로 숙청 당하면서 그때부터 사학이 융성하기 시작했으며 사림파가 출현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