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4차 십자군 전쟁 그리고 뱅크
2024-07-06 어기선 기자
베네치아의 해군력
4차 십자군 전쟁 이전에도 베네치아는 동로마 황제들에게 해군력을 지원해주는 대가로 통상 특혜를 부여받았다. 즉, 아시아에서 산출된 후추를 유럽에 판매하는 중간역할을 하면서 막대한 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상업 공화국으로 독보적인 지위를 구가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국가들이 십자군 전쟁을 발판으로 점차 성장했고, 동로마 측과 통상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다보니 베네치아는 점차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베네치아-동로마 해전이 발발했고 베네치아는 동로마 해군에게 패퇴 당했다. 이후 베네치아와 동로마는 화해를 했지만 베네치아의 위상은 과거와는 다르게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교황이 4차 십자군 전쟁을 준비한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베네치아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4차 십자군 전쟁 선포했지만
1198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4차 십자군 전쟁을 선포했지만 유럽 국왕들은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 이유는 원정을 가도 특별히 실익을 얻어서 돌아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교황은 계속해서 설득했고, 겨우 십자군 원정팀을 꾸릴 수 있었다. 목표는 이집트였다. 그 이유는 전리품이 많이 있을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에 해로를 확보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였다. 그러자 해운 상업 공화국들을 상대로 의사 타진을 했지만 제노바 공화국은 이를 거절했고, 베네치아 공화국이 협상 테이블에 올랐고, 33,500명의 병력을 이집트로 실어다 주고 9개월 분량의 보급을 책임지는 대신, 은화 8만 5천 마르크와 점령지의 영토 일부를 대가로 지불하기로 했다.자금난에 부딪히면서
문제는 자금난이었다. 베네치아 입장에서 배가 준비됐지만 함대를 이동할 자금과 선원이 부족해진 것이다. 출항을 하기도 전에 파산할 것이라는 자조 섞인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에 베네치아가 내놓은 타개책은 다른 기독교 국가를 침략해서 자금을 조달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크로아티아 서쪽 달마티아 지방의 ‘자다르’를 함락했다. 그러자 동로마 제국에서 폐위된 아사키오스 2세 아들인 알렉시오스 황자가 뜻밖의 제안을 한다. 자신에게 황위를 되찾게 해주면 이집트 원정을 위한 비용 20만 마르크를 지불하고, 성지 수호를 위해 병사 1만과 기사 500명을 파견하고 교황수위권을 인정하고 동방 정교회를 로마 카톨릭 산하로 통합시킨다는 내용이었다. 교황은 제안을 거부했지만 십자군 측은 생각이 달랐다. 그리고 베네치아는 대환영을 했다. 동로마제국과 소원해진 베네치아 입장에서 동로마제국에 친베네치아 정부가 탄생하게 된다면 지중해 통상권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됐기 때문이다.콘스탄티노플 함락하자
4차 십자군 전쟁에서 결국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됐다. 그리고 침략자들은 은과 금 및 다양한 보석들을 약탈했다. 콘스탄티노플은 두 번 다시 일어설 수 없게 됐고, 베네치아는 그야말로 막대한 부를 쌓게 됐다. 그러면서 베네치아는 환전상이 생겨났다. 그 환전상들이 동전을 올려놓는 탁자를 가리켜 ‘banca’라고 불렀다. 그렇게 베네치아는 중세 때 해상 강국이 됐고, 이것을 바탕으로 르네상스가 도래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