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제1·2차 세계대전 그리고 경제대공황

2024-07-11     어기선 기자
사진=픽사베이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제1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에서 식민지를 재정리하는 전쟁이었다. 19세기 산업혁명이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생산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저임금 노동자들의 노동력과 그리고 생산된 물자를 소비할 수 있는 식민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20세기 들어서면서 제국주의국가들이 더 이상 식민지를 개척할 수 없게 되자 남의 식민지를 빼앗는 방식을 선택했다. 그러던 것이 대규모로 충돌했던 것이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웠고, 그로 인해 교통정리가 되는 듯 했다. 이제 제국주의국가는 더 이상 식민지를 늘리는 방식으로 생산된 물자를 소비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게 됐다. 재고는 계속 쌓이는데 더 이상 판로가 없었다. 공급이 과잉이 되면 경기는 침체되고, 그것이 대량실업으로 이어지면서 소비가 위축되고 소비가 위축되니 공급이 광잉 되는 그런 악순환 구조가 형성됐다. 이는 모든 국가에서 일어난 현상이었다.

노동자가 곧 소비자 간과

제국주의국가들이 더 이상 소비시장을 개척할 수 없는 상태에서 소비 시장을 개척하는 방법은 내수 시장을 활성화하는 방안이었다. 하지만 자유방임주의를 표방한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저임금 노동자를 선호했다. 노동자의 임금은 가급적 저렴하게 그러면서 대량생산을 이뤄내는 방식을 취했다. 문제는 노동자가 곧 소비자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노동자의 소비능력 상실은 소비자가 위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사회 전체적으로 실업자가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비가 감소되면 공급 과잉이되고, 공급량을 줄이기 위해 가격 인하 경쟁이 일어나고, 가격 인하를 위해 노동자를 해고하고, 해고된 노동자는 다시 소비 능력을 상실하면서 수요를 창출하지 못하고 공급 과잉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됐다. 이것이 전세계적으로 번져 나간 것이 1930년대 세걔경제대공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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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뉴딜 정책으로

대공황을 탈피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소비자를 대폭 만들어 내는 것으로 소비자에게 두둑하게 돈을 만들어 내거나 식민지를 다시 늘리는 방식이었다. 미국은 소비자의 호주머니를 두둑이 만드는 방법을 고안했다. 바로 루즈벨트가 시행한 뉴딜정책이다. 공급과잉을 해소하기 위해 국가가 인위적으로 개입해 조절하는 정책이다. 대규모 공공사업을 통해 노동자를 양산하고, 월급을 받게 했고, 생필품을 사게 함으로써 수요가 증가하고 수요가 증가하니 제품 생산을 위해 멈췄던 공장을 다시 돌리게 했다. 공장이 돌아가니 다시 노동자가 필요하고, 고용이 창출되면서 노동자의 소득이 높아지고, 이것이 소비로 이어지면서 대공황을 극복해나갔다.

독일은 사정이 여의치 않아

하지만 독일은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이었던 독일은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이에 국가 파산 상태까지 내몰렸다. 그때 나타난 인물이 바로 히틀러이다. 히틀러는 독일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바로 전쟁 배상금이라고 판단하고,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고 배상금을 물지 않게 하겠다고 선동했고, 결국 실권을 잡았다. 실권을 잡은 히틀러가 전쟁 배상금을 물지 않겠다고 전세계로 선포를 하게 된다면 그에 따라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은 항의를 할 것이 분명했으니, 히틀러가 생각한 방법은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을 상대로 전쟁을 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전쟁자금의 부족이었다. 이에 유대인들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 아리안순혈주의를 내세웠고, 결국 유대인 600만 대학살인 홀로코스트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일본은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이었다. 하지만 1920년대 경기 침체를 겪었고, 1930년대 초반 세계경제대공황이 불어 닥쳤다. 일본이 돌파하는 방법은 하나였다. 그것은 식민지를 더욱 늘리는 방법이었다. 이런 이유로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계속해서 식민지 영토를 넓혀가는 방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영토를 차지하게 되면서 미국이 점차 견제를 하기 시작했고, 석유 수출 금지 조치를 내리게 됐다. 그로써 진주만공습으로 이어지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