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7월 25일 청일전쟁 발발

2024-07-25     어기선 기자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894년 7월 25일은 청일전쟁이 발발한 날이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를 하면서 청나라 개입이 차단된 대신 일본이 조선을 먹어치우면서 친일내각이 수립됐다. 하지만 삼국간섭 등 러시아가 개입되면서 일본의 야욕은 좌절되는 듯 했다. 이에 을미사변, 아관파천 등이 일어나면서 조선 정국은 격동의 세월을 맞이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하면서 청나라부터 배상금과 요동반도 등을 할양받았고, 근대화를 더욱 추진하면서 러일전쟁 승리의 기틀을 닦았다.

일본의 경복궁 점령

청나라가 조선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가운데 일본 역시 조선에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청나라 때문에 본격적인 진출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해서 고종이 청나라 군대를 요청하면서 일본 역시 일본 군대를 조선에 주둔하게 하기로 결정을 한다. 청나라가 아산만을 통해 2천800명의 병사를 파병하게 되면서 톈진조약에 따라 일본에게 파병 사실을 알렸다. 일본은 일본 거류민과 공사관을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제물포 조약 조항에 의거해 8천명을 인천만에 파병했다. 이에 동학농민군과 조정은 외세에 빌미를 줄 수 없다면서 전주화약을 맺고 동학농민군은 해산을 했다. 그러자 조선 조정은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에게 모두 철수를 하라고 명을 내린다. 하지만 그해 6월 12일 일본군은 제물포에 상륙을 했고, 6월 23일 한양으로 진군해 일부는 용산에 주둔하고 일부는 한양 시내를 진군했다. 그리고 7월 23일 경복궁을 공격했다. 당시 조선군 경군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한양을 비워뒀기 때문에 병력이 많지 않았다. 결국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했다.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은 청나라에서 독립선언을 하라고 요구하고 갑오개혁을 요구했다.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은 7월 25일 황해 아상만 부근 풍도(현재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풍도동)에서 일본 해군이 청나라 해군을 향해 기습 선제공격을 했다. 이로써 청일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청나라 패퇴 이후

결국 청나라는 청일전쟁에서 패퇴를 했다. 이에 청나라와 일본은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정전 회담을 열었다. 일본은 엄청난 전쟁 배상금을 요구했지만 청나라는 곤란하다면서 손사레를 쳤다. 이 과정에서 이홍장이 일본인에게 저격을 당해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상황이 역전됐다. 그러면서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했는데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포기한다는 내용이다. 아울러 요동 반도, 대만과 그 부속 도서, 펑후 제도를 할양하였고 고평은 2억 냥을 7년 이내에 배상하기로 했다. 이는 일본 정부의 4년치 세입이었다. 위기를 느낀 러시아는 결국 삼국간섭을 일으키게 되면서 한반도는 풍전등화에 놓이게 됐다. 청일전쟁으로 파탄이 난 곳은 평안도이다. 평안도 경제는 양군의 물자약탈과 노동 징발로 피해가 극심했다. 여기에 일본에 반기를 든 2차 동학농민운동이 삼남지방에 일어났고, 일본군은 첨단무기를 앞세워 이들을 유혈진압했다. 구한말 우리나라 재정이 파탄나게 된 원인은 바로 청일전쟁 당시 양군의 무리한 물자약탈과 노동 징발로 평안도 일대 경제가 망하게 됐고, 2차 동학농민운동으로 많은 농민군이 죽음으로써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사람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