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조선시대 버터

2024-07-26     어기선 기자
사진=픽사베이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버터는 우유 속 지방을 모아서 고체로 가공한 것으로 흔히 서양 식재료로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버터가 만들어졌고, 왕실에서는 귀한 식재료로 여겼다. 이런 이유로 버터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군을 면제해줬고, 버터를 만드는 곳을 수유치(酥油赤)라고 불렀다. 수유치는 주로 타타르인이 거주했는데 타타르 사람은 주로 북방 유목민족으로 한반도에 귀화한 사람들을 말한다.

고려사에도 기록된 버터

1297년 11월 19일 고려사에 따르면 원에 인산과 탐라 수유(酥油)를 바쳤다고 기록돼 있다. 여기서 수유는 버터를 말한다. 한반도에 버터가 전래된 것은 몽골의 영향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몽골 민족은 가축의 젖으로 버터를 만들어 먹었다. 그런 몽골이 고려를 침입하고 여몽항쟁기를 지나 원나라 간섭기에 들어서면서 고려에게 버터를 만들어 공물로 바칠 것을 요구했다. 이에 고려사에도 수유를 바쳤다고 기록이 돼있다. 원나라가 멸망 후 더 이상 버터를 공물로 바칠 일이 없으면서 주로 왕실이나 신하들이 버터를 건강식으로 즐겨 먹는 식재료가 됐다.

워낙 만들기 까다로우면서 군 면제까지

수유(버터)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축의 젖을 짜서 달인 후 위에 뜨는 부유물을 걸러내고 이를 뭉쳐 만들었다. 시간과 정성을 쏟아야 가능했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버터를 만드는 사람은 군 면제를 해줬다. 원래 버터는 타타르인이 주로 만들었다. 그들은 유목민의 후예였기 때문에 가축을 잘 다루고 버터를 잘 만들었다. 하지만 세종실록에 따르면 세종 3년 11월 28일 많은 사람들이 군대에 가지 않기 위해 수유 만드는 집으로 위장 전입했다고 기록돼 있다. 즉, 타타르가 사는 집에 위장전입을 한 셈이다. 실제로 황해도 서흥군에서는 한 집에 21명의 남자가 등록돼 적발되기도 했다. 이에 태상왕이었던 태종이 격분하고 수유 만드는 사람들의 군 면제 혜택을 페단했다. 이에 신하들은 수유는 임금의 약으로 사용하고 있고, 늙고 병든 신하들에게 내리기 때문에 안된다고 반대를 했지만 태종은 “그대가 알 바가 아니다”면서 뜻을 관철했다.

우유 생산 어려웠던 이유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가 우유 생산이 어려웠던 이유는 주로 산악지대이기 때문이다. 드넓은 초원지대가 없다는 점에서 젖소를 키우는 환경으로는 부적합하다. 젖소를 키우기 위해서는 드넓은 초원지대가 필요하다. 원나라가 원나라 간섭기에 제주도에 말이나 소 등 가축을 키우게 한 것도 제주도는 초원지대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나라는 농경사회였기 때문에 소를 귀하게 여겼다. 그런 의미에서 젖소보다는 일을 할 수 있는 황소를 선호했다. 그리고 황소는 젖소에 비하면 우유 생산량이 턱없이 부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