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통한 과거리뷰] 영화 바비·오펜하이머 그리고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2024-08-02 어기선 기자
왜 원폭 투하를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는 1945년 태평양 전쟁 당시 승기를 잡은 미국이 일본제국의 항복을 이끌기 위해 일본 제국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한 사건이다. 수십만명의 민간인이 희생 당한 해당 사건에 대해 윤리적, 법적 논란은 오랫동안 이어져왔다. 그러면서 일본 내에서는 일본은 마치 태평양전쟁의 희생양처럼 판단하고 있고, 미국은 태평양전쟁의 가해자 취급을 하고 있다. 원래 맨해튼 계획은 나치 독일의 핵개발 소식을 듣자 연합군이 우위를 선점하기 위해 미국, 영국이 공동 계획 하에서 추진했다. 그러는 사이 독일제국은 결국 항복을 했지만 일본 제국은 계속해서 저항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1944년부터 일본 제국 수뇌부는 소련을 중재자로 하는 화평 논의를 해왔다. 한반도, 중국 동부, 만주, 사할린을 포기하고 항복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소련은 훗카이도를 정복할 야심이 있었기 때문에 중재자 역할을 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던 과정 속에서 1945년 7월 26일 포츠담 선언이 발표됐지만 일본 제국은 천황제 유지가 불투명한 무조건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1억 총옥쇄를 외치며 끈질긴 저항을 했다. 이에 이오지마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에서 미군의 희생이 컸다. 그러자 미국 내 여론에서는 원자탄을 사용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여기에 소련이 태평양전쟁에 참전을 할 것 같은 분위기를 보이자 미국으로서는 전쟁을 빨리 끝내야 한다는 절박감을 보였다.하필 히로시마·나가사키에
결국 원폭을 사용하기로 결정을 하면서 후보지를 물색하기에 이르렀다. 문제는 파괴할 도시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미군은 주요 도시에 폭격을 가하면서 사실상 도시로서의 기능이 상실했기 때문이다. 이에 찾아낸 곳이 바로 히로시마이다. 그리고 이어서 4개 도시인 고쿠라(현 기타큐슈), 요코하마, 니가타, 그리고 교토가 추가되어 총 5군데의 우선 폭격 목표가 정해졌다. 하지만 교토를 목표 도시로 선정하는 것에 대해 곧 반대에 부딪히게 됐다. 왜냐하면 교토는 인류 문화유산이 있는 도시이면서 일본 문화의 정신이 깃든 곳이기 때문에 해당 도시를 폭격할 경우 일본인의 저항이 더욱 커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도시가 부각됐다. 그곳은 바로 나가사키였다. 나가사키는 큰 도시면서 미쓰비시 중공업의 조선소가 있었고, 일본 해군의 주요 군항이었기 때문이다.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했는데도 항복하지 않으면 나가사키에,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했는데도 항복을 하지만 다음 도시에 원폭을 투하하는 방식을 사용하겠다고 미국은 계획을 세웠다.일본은 원폭 때문에 항복했나
결국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하자 일본 제국은 무조건 항복을 했다. 이에 원폭 투하가 태평양 전쟁을 종식시켰다는 것이 역사가들의 중론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한 것은 원폭 때문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왜냐하면 이미 일본은 1억 총옥쇄 각오를 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일본 제국 국민 모두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싸우겠다는 것이 당시 분위기였다. 따라서 몇 개 도시에 원자폭탄이 떨어진다고 해도 꿈쩍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소련군에 의해 관동군이 참패한 것이다. 당시 관동군의 병력이 60만이었다. 따라서 소련군이 아무리 남하를 한다고 해도 저지할 것으로 판단했다. 그것은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소련군이 참전을 선언하자마자 관동군이 참패를 당한 것이다. 관동군이 참패를 당했다는 것은 곧 소련군이 훗카이도로 밀고 들어올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일본 제국 수뇌부는 공산국가인 소련군에 의해 자국의 영토가 점령되는 것보다는 오히려 미국에 항복을 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하면서 무조건 항복을 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