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8월 16일 사실상 광복 맞아
2024-08-16 어기선 기자
조용했던 8월 15일
8월 15일은 그야말로 조용한 날이었다. 이날 아침 여운형은 엔도 정무총감과 교섭을 벌여 일본인들의 무사귀환을 조건으로 5개 조항을 요구했다. 조선총독부는 여운형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에 ‘중대발표가 있으니 조선인들은 경청하라’는 벽보가 경선 시내 곳곳에 나붙었다. 하지만 당시 라디오를 가진 조선인들이 많지 않았다. 지식인들이나 부자들은 라디오를 갖고 있었지만 워낙 어려운 한자어를 섞었고, 방송은 잡음이 심했다. 무엇보다 히로히토 국왕의 발표 내용이 애매모호해서 과연 항복을 한 것인지 결사항전을 한다는 내용인지 제대로 파악을 하지 못했다. 히로히토 국왕은 “전쟁을 끝내고 평화의 시대를 연다” 혹은 “연합국의 공동성명을 수락한다”는 내용만 언급했다. 즉 종전만 언급했을 뿐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한다는 내용을 찾아볼 수 없었다. 더욱이 당시 ‘연합국의 공동성명’이 ‘포츠담 선언’이라는 것을 조선인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8월 15일 당일에는 조선 백성들이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와 만세를 부르지 않았다. 오후부터 서서히 마포 형무소와 서대문형무소에서 정치범들의 석방이 이뤄질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광복이라는 것을 점차 알기 시작했다.8월 16일 정치범이 석방되자
8월 16일 비로소 여운형과 조선총독부 간의 체결됐던 5개 조항의 실현이 이뤄지면서 서서히 조선 백성들은 히로히토 국왕의 방송이 항복 방송이라는 것을 알기 시작하면서 환호했다. 당시 3.1 운동으로 인해 태극기를 모조리 압수당했기 때문에 노인들이나 중장년층들은 어렴풋한 기억으로 태극기를 그렸다. 이런 이유로 태극기 문양이 맞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일부 사람들은 급한대로 일장기에 먹칠을 하고 사괘를 그려 태극기를 만들기도 했다. 시민들은 계동에 있는 여운형의 집에 몰려가 연설을 요구했고, 여운형은 휘문중학교 운동장에서 광복을 맞이하는 연설을 했다. 하지만 소련군이 서울역에 도착했다는 소문이 나면서 군중들이 서울역으로 몰려가면서 중단됐다. 하지만 조선총독부가 여운형 연설이 끝난 후 민중들이 조선총독부로 몰려갈 것을 염려해서 헛소문을 퍼뜨린 것이었다. 여운형은 이날 조선건국동맹을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 바꾸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건준은 우리나라가 광복됐다는 사실을 전국방방곡곡에 알렸다.조선에 남았던 일본인
조선땅에 남아있던 일본인은 두 가지 선택을 해야 했다. 조선땅에 계속 남아있느냐 아니면 일본으로 건너가야 하는 선택이었다. 노년층이나 장년층은 일본 땅에서 넘어온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고향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거부감이 덜했지만 청년들은 자신이 왜 조선땅을 버리고 일본으로 가야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조선땅은 자신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외로 조선 백성들의 보복성 공격이 많지 않았다. 이는 건준이 일본인을 대상으로 보복공격을 하지 말라고 계속 주문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청년층 일본인들은 일본으로 가지 않고 조선땅에 남기로 했고, 그들은 점차 세월이 지나면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동화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