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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천소사]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 기념미사

한국 최초 가톨릭 사제 김대건 신부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와 인연 깊어

2024-09-16     박길상 기자

인천투데이 = 박길상 기자 | 78년 전 오늘, 1946년 9월 16일, 천주교 인천교구 답동성당에서 한국 최초 가톨릭 사제인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 기념미사가 있었다.

김대건은 충청남도 당진 내포지방 솔뫼에서 아버지 김제준(세례명 이냐시오)과 어머니 고씨(우르술라)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대건 신부 초상(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어린 시절 이름은 재복이고, 족보 명은 지식이다. 그의 세례명 안드레아는 순교자인 작은할아버지 김한현의 세례명을 이어받았다.

김대건 신부 위로 3대가 순교한 천주교 집안

김대건이 태어났을 때 이미 증조부와 작은할아버지가 순교한 천주학 집안이어서 가세는 기울대로 기울었다. 박해를 피해 할아버지 김택현은 김대건이 7살이 되던 해에 경기도 용인시 내사면 남곡리 '골배마실'이라는 산골로 이사했다.

15살 때인 1836년 피에르 모방 신부가 신학생으로 발탁했다. 최양업(토마스)과 최방제(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가 신학을 공부했다. 김대건은 1844년 12월 가톨릭 부제품을, 1845년 8월 17일 상해 진쟈샹(金家巷) 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1845년 10월 김대건 신부는 순교한 앵베르 주교의 후임으로 제3대 조선대목구장에 임명된 페레올 주교와 함께 라파엘 호를 타고 충남 강경을 거쳐 입국했다. 입국 후에는 은이공소(골배마실)를 중심으로 미사 집전과 고해성사 등 사제 역할을 수행했다.

귀국 후 미사 집전 등 사제 역할과 선교사 밀입국 경로 개척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신부에게 외국 선교사들이 입국할 수 있는 길을 개척할 것을 지시했다. 김대건 신부는 외국 선교사의 해로를 통한 조선 밀입국 경로를 개척하기 위해 백령도와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등을 순회했다.

김대건 신부는 백령도를 거점으로 하는 밀입국 경로를 페레올 주교에게 건의했다. 중국 산동반도와 가깝고, 매년 봄 그 근해 어장에 중국 어선들이 모여드는 것에 착안했다. 선교사들이 중국 어선으로 백령도 근해에 도착하고, 이곳에서 조선 교우들의 도움을 받아 입국하는 방안을 채택했다.

실제로 김대건 신부의 개척으로 백령도는 1846년부터 1880년까지 메스트르 신부(1852년 입국)를 비롯해, 프랑스 선교사 17명의 입국 거점이 됐다.

1846년 5월 14일 김대건 신부는 서울 마포를 출발했다. 연평도를 거쳐 백령도 앞바다에 도착해, 앞으로 선교사들은 백령도 밀입국로를 이용하라는 페레올 주교 서한을 중국 선원에게 전달했다. 그 직후인 1846년 6월 5일 황해도 순위도에서 체포된다. 순위도는 백령도, 초도와 함께 황해도 3대 섬으로 불렸다.

서울 새남터에서 신자 12명과 함께 순교...성인으로 시성

1846년 9월 16일 김대건 신부는 새남터 성지에서 12명의 신자와 함께 참수돼 순교했다. 머리는 효수됐다. 김대건 신부 시신은 새남터 모래밭에 가매장 됐다.

순교 14일 만에 천주교 신자인 이민식(빈첸시오)이 경비병 몰래 시신을 수습해 자신의 고향인 미리내 성지(경기도 안성)로 옮겨 장례를 치렀다. 1960년 7월 5일 혜화동 가톨릭대학교 성당으로 이장했다.

1857년 교황 비오 9세가 김대건 신부를 가경자(시복 후보자)로 선포했고,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가 복자로 선포했다.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을 방문해 김대건 신부를 성인으로 시성했다. 현재 한국천주교회 성직자들의 수호성인으로 모셔지고 있다.

김대건 신부와 인천 섬 인연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김대건 안드리아 성인의 유해 일부가 안치된 백령성당, 성인 탄생 200주년이던 2021년 신축된 대청도성당, 성인상이 세워진 소청도 공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