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통한 과거리뷰] 윤미향 조총련 행사 참여 논란, 與 “임수경 무단방북 시즌2”
2024-09-04 어기선 기자
임수경 방북이란
임수경 방북이란 1989년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임수경 당시 대학생이 참석한 것을 말한다. 당시 전대협 제3기 의장인 임종석의 주도 하에 이뤄진 것이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7.7 선언을 하는 등 공상권과의 대대적인 교류와 조건 없는 남북대화를 주장했었다. 따라서 대학생의 방북에 대해서도 상당히 허용될 것이라는 기대를 했다. 이런 가운데 문익환 목사의 밀입북 사건이 벌어지면서 갑작스럽게 대학생 방북에 대해 불허 입장으로 선회했다. 하지만 임수경은 일본-서독-동독-소련을 통한 우회로를 선택했고, 6월 30일 평양에 도착했다. 평양에 도착한 임수경은 돌아갈 때는 판문점을 통과하겠다는 입장을 밝혔고, 전세계 언론사들은 ‘전대협은 마침내 평양을 도착했다’면서 긴급 타전했다. 결국 경찰은 당시 임종석 의장 체포를 하기 위해 한양대에 투입됐고, 학생 2천여명을 강제 연행했다.북한 사회 큰 충격 주고
임수경은 7월 3일 푸른 치마와 흰 저고리 차림으로 평양 인민대회장에 나타나 ‘전대협이 드리는 호소문’을 낭독했다. 그 장면이 고스란히 보도되면서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줬다. 그리고 임수경은 눈물 흘리면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부르며 기자회견장을 떠났다. 임수경의 방북은 남북 모두에게 큰 충격을 안겨줬다. 북한의 경우 ‘대학생이 북한에 왔다’는 소식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왜냐하면 그 당시 북한을 방문한 남한 측 인사들 대다수가 나이가 지긋한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수경은 평범한 대학생, 그것도 여학생이었다는 차원에서 상당한 충격을 안겨줬다. 게다가 임수경은 북한 체제의 문제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이야기했다. 임수경은 기자회견 때마다 “북한이 좋아서 온 것 아니다”고 말했고, 물론 북한 언론들은 그녀의 발언을 잘라서 보도하느라고 애를 먹었다.남한 사회도 큰 충격으로
우리 사회에서도 큰 충격이었다. 처음에는 치기 어린 여자애의 행동으로 취급했다. 다만 노태우 정권 입장에서도 뜻하지 않은 선전효과를 북한에 전달했다는 점에서 썩 나쁘게 평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임수경이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청년학생 공동선언문’을 발표하면서 노태우 정권의 입장이 달라졋다. 그 이유는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임수경에 대한 비판 여론이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그에 따라 임수경 가족들도 고초를 겪어야 했다. 임수경은 8월 15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을 했고, 결국 안기부에 가서 조사를 받았고, 결국 유죄 확정판결까지 받았다. 그리고 1992년 12월 24일 성탄절 특사로 가석방됐다.북한 주민이 또 다시 놀란 이유
북한 주민들은 임수경 방북 이후 1년이 지난 시점에서 또 다시 놀래야 했다. 1990년 남북 고위급 회담이 열렸을 당시 북한 기자방문단이 임수경의 집을 방문했다. 그 이유는 북한 주민들에게 통일 열사의 가족이 고초를 당하고 있고, 남한 인민들은 통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임수경이 살던 자택에 북한 기자단이 가보니 식솔들은 멀쩡히 살아있었기 때문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북한 주민들 같으면 임수경 방북 같은 일을 했다면 가족들이 정치수용소 등에서 고된 노동을 해야 했겠지만 임수경 가족들은 멀쩡히 살아서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게다가 임수경 집에 컬러 TV, 쇼파, 냉장고 등 가전제품과 냉장고에는 통조림과 우유가 있는 것을 생중계로 북한 주민에게 보여준 상황이기 때문에 북한 주민은 남한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잘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탈북자가 1990년대부터 늘어나기 시작하는데 임수경 집을 생중계로 북한 주민들에게 보여준 것이 시발점이 됐다는 평가도 있다. 북한 기자방문단은 체제 선전을 위해서 임수경 자택을 방문했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북한에게 독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