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9월 7일 아나니 사건 발생, 교황 뺨 맞다

2024-09-07     어기선 기자
교황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303년 9월 7일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프랑스 필리프 4세 추종 기사인 샤라 콜론나로부터 뺨을 맞은 날이다. 1077년 1월 28일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가 자신을 파문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 북부의 카노사 성으로 가서 용서를 구한 사건인 카노사의 굴욕으로 교회의 권한이 왕의 권한보다 높았던 시절에서 이제는 왕의 권한이 높아진 시절로 바뀌게 됐다. 이때부터 절대왕조의 씨앗이 꿈틀거리기 시작했고, 봉건시대가 곧 종식이 된다는 것을 세상에 알린 사건이 바로 아나니 사건이다.

모든 것은 ‘돈’에서 출발

카노사의 굴욕도 결국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에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중세봉건시대에는 장원제(라티푼디움)이었다. 장원은 영주와 농노로 구성돼 있다. 농노는 자신의 땅을 경작하면서도 영주의 땅을 경작해주는 관계였다. 영주는 ‘왕’ ‘봉건기사’ 그리고 ‘교회’가 있었다. 즉, 장원의 실질적인 주인인 영주가 왕이냐 봉건기사냐 교회냐에 따라 달라진다. 문제는 하나의 장원에 영주가 여러명이 있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교회 즉 성직자에게 봉토를 나눠주는 사람은 ‘교황’이었고, 봉건기사에게 봉토를 나눠주는 사람은 ‘왕’이었다. 이런 이유로 중세시대에는 누가 봉토를 나눠주느냐를 두고 교황과 왕의 갈등이 이뤄질 수밖에 없었다. 왕은 교황으로부터 국호와 직책을 부여받는다고 해도 서로의 필요에 의한 계약관계 형태이다. 왕이 교황을 무시 못하는 이유는 중세시대는 기독교 사회이기 때문에 교황을 무시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교황은 봉토의 실질적 지배자인 왕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카노사 굴욕은 이런 왕과 교황의 관계가 무너지는 상황이 됐다. 하인리히 4세가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권위를 무너뜨리기 위해 성직자들에게도 봉토를 나눠주게 됐다. 하지만 교황 그레고리 7세는 그것을 두고 볼 수 없었고, 그 과정에서 교황의 권위가 높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게 된 것이 카노사의 굴욕이다.

시대가 바뀌게 되고

하지만 왕의 봉토 영유권은 점차 강화되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200여년이 지난 1300년 들어서면서 교황 보니파시오 8세과 프랑스 필리프 4세의 갈등은 점차 고조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추기경이 분열됐기 때문이다. 1294년 12월 24일 카에타니 추기경이 보니파시오 8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에 선출됐지만 단테는 ‘신곡’을 통해 보니파시오 8세가 부정투표로 선출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보니파시오 8세를 인정하지 않은 사람은 비단 단테뿐만 아니었다. 로마 명문가 콜론나 가문의 두 추기경이 교황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보니파시오 8세와 콜론나 가문과의 충돌이 불가피해졌다. 콜론나 가문은 프랑스 왕의 지원을 기대했지만 필리프 왕은 교회 분담금 문제를 마무리하느라 교황과 더 이상의 갈등이나 불편한 관계를 원치 않았다. 이에 콜론나 가문의 두 추기경은 교황에게 무릎 꿇었고, 콜론나 가문의 식구들은 모두 타볼리로 강제 이주했다. 이에 보니파시오 8세는 콜론나 가문의 영지 중 팔레스트리나 지역을 차지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여전히 콜론나 가문 소유라는 것을 알게 됐고, 도시를 아예 없애버렸다.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키고 땅에 소금을 뿌린 것이다. 결국 1299년 콜론나 가문은 프랑스로 망명했다.

뺨 맞은 교황

하지만 교황은 계속해서 압박하면서 필리프 4세 역시 위기감을 느끼게 됐고, 1302년 4월 삼부회를 열어 반교회 정책을 주도했다. 그 사이 스페인과 포르투칼 등 군주제 국가가 탄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교황의 권위는 세상의 모든 권력에 우선한다’고 선포했다. 이에 분노한 필리프 4세는 콜론나 가문의 샤라 콜론나(를 교황이 거주하는 아나니로 보내 교황을 체포하도록 했다. 그리고 샤라 콜론나는 교황을 체포했다. 교황이 내가 누군지 아느냐고 하자 샤라 콜론나는 교황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이것이 아나니 사건이다. 아나니 사건으로 인해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은 끝내 사망했고, 이후 교황들은 필리프 4세의 꼭두각시가 됐으며 훗날 아비뇽의 유수 사건이 발생했다. 즉, 더 이상 교황의 권위가 왕의 권위를 통제하지 못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