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차세계로의 산티아고 순례길 05] 11kg 배낭 무게도 잊을 만큼 산뜻한 기분, 충분한 휴식 덕분
- 시종일관 혼자 걷는 사람, 세월아 네월아 여유로운 순례자도 있어
- 배낭 속 노트북을 던져 버리고 싶었던 시간도 '내 인생의 십자가'
- 엄마 같은 도시, '부루고스. 2박 동안 휴식을 보내기로 한 순례길 최애 도시
2024-09-11 양시영 인플루언서
[파이낸셜리뷰=양시영 인플루언서] 벨로라도(Belorado)로 향하는 10일 차, 이날 발걸음은 왜인지 모르게 더 가벼웠다. 쾌적하고 안락했던 산토 도밍고(Santo Domingo de la Calzada) 공립 알베르게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한 덕분이었을까? 점차 순례에 몸과 마음이 적응돼서였을까? 오늘은 11kg 배낭의 무게도 잊을 만큼 산뜻한 기분과 가벼운 발걸음으로 순례를 시작할 수 있었다.
각자의 방식대로 걷는 순례자들
많은 순례자가 모두 자신만의 방식으로 순례길을 걷는다. 누군가는 첫날부터 10명 남짓의 동행을 만들어 함께 걷는 사람이 있고, 시종일관 홀로 걷는 사람도 있고, 빠른 걸음으로 돌진하는 사람도, 세월아 네월아 여유롭게 걷는 이도 있다.
카미노를 걷는 방식은 그 사람이 삶을 대하는 태도와 매우 흡사하다고 했다. 나는 내향적이지만, 사람과의 깊은 소통 또한 좋아하는 아이러니한 성격을 갖고 있다. 이런 내 성격은 역시나 나의 순례 스타일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혼자 사색하는 것을 좋아해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걸었지만, 우연한 대화로 좋은 인연이 닿은 이들과는 깊은 유대를 주고받았다. 그렇게 벨로라도로 향하는 길 위에서 만난 다양한 순례자들 덕분에 수십 가지 형태의 삶의 방식을 엿볼 수 있었다.
내 인생의 십자가 같았던 11kg 배낭
11일 차 순례의 목적지는 정하지 않고 길을 나섰다. 본래 산티아고 순례길 고전 루트는 벨로라도에서 산후앙(San Juan de Ortega)까지인데, 걷다 보니 체력이 조금 남아 아헤스(Ages)까지 가 보기로 했다.
오늘은 유독 구름 한 점 없이 태양이 뜨거워 배낭이 한없이 무겁게 느껴졌다. 이렇게 더운 날엔 ‘동키 서비스’가 절실하다. 잠시 동키 서비스에 관해 얘기해 보자면, 순례자들의 배낭을 출발하는 마을에서 도착하는 마을까지 옮겨주는 서비스이며, 가격은 평균 6유로 정도다.
이런 땡볕에 11kg 배낭을 메고 순례할 때면, 드넓은 평야에 노트북을 던져 버리고 싶은 마음마저 든다. 그런데도 내가 동키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은 이유는 이 배낭의 무게가 마치 ‘내 인생의 십자가’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 욕심으로 꾸역꾸역 담아 온 이 배낭을 스스로 온전히 책임지고 싶었다. 물론 컨디션이 안 좋거나, 날이 너무 궂을 때는 당연히 배낭 이동 서비스를 이용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끝까지 내 십자가를 지고 완주하고 싶었다.
순례길 최애 도시, 부르고스에 가다
열악한 공립 알베르게를 전전하며 점점 피로도가 쌓였지만, 12일 차 순례를 시작하는 내 마음은 누구보다 들떠 있었다. 이유는 바로 오늘 순례길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도시, 부르고스(Burgos)에 도착해, 2박 동안 휴식을 취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내가 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걸으니, 대만인 순례자 레오가 왜 그렇게 부르고스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나는 ‘부르고스는 뭔가 엄마 같은 도시야, 따뜻하면서도 카리스마 있달까? 너도 보면 알 거야’라고 답했다. 레오는 추상적인 나의 대답에 껄껄 웃으며, 본인은 부르고스가 큰 도시인 만큼 아시안 음식을 맘껏 먹을 수 있어 너무 좋을 거 같다고 했다.
그렇게 도착한 부르고스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고, 그 또한 매우 아름다웠다. 대성당을 한참 바라보다 레오와 다시 만났고, 저녁으로 한식을 야무지게 먹으며 부르고스에서의 첫날을 마무리했다. 순례 중 처음으로 늦잠을 잤다. 평소 아침잠이 많은 내게 1인실 연박은 꿀맛 같은 휴식이었다.
이날은 날씨도 좋아 여유롭게 도시 관광을 했는데, 역시나 맑은 날 바라본 부르고스 대성당은 더욱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부르고스 대성당을 바라보며, 7년 전의 나와 현재의 나 자신을 다시 한번 되돌아봤다. 지난 시간 동안 나 자신은 그대로인 거 같은데, 주변에 많은 것들이 바뀌어 버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채 우직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부르고스 대성당을 보니 괜스레 아련한 마음이 들었다.
이유 모를 공허함이 나를 감쌌지만, 궁극적으로 새로운 성장을 위해 다시 한번 순례길에 오른 나의 용기에 박수 쳐주며, 사랑하는 부르고스에서 아름다운 시간을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