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통한 과거리뷰] 대학교 본교·분교 차별, 박정희 그림자 어려

2024-09-11     어기선 기자
사진=연합뉴스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대표적인 대학가 축제인 고연전(짝수해는 연고전) 과정에서 ‘분교’와 ‘분교’의 차별·혐오가 드러나면서 지방캠퍼스 소속 학생에 대한 멸시와 차별이 만연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학생 커뮤니티 ‘에브리타임’ 자유게시판 등에는 ‘원세대 조려대’라는 제목으로 두 학교의 분교생을 깎아내리는 게시물 등이 올려졌다. 해당 표현은 연세대학교 미래캠퍼스와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를 부르는 멸칭이다. 해당 작성자는 “연고전 와서 사진 찍고 인스타 올리면 니가 정품 되는 거 같지?”라며 “니넨 그냥 짝퉁이야 저능아들”이라고 조롱했다.

수도권 인구 분산 정책에 의해

1945년 광복이 된 이후 고등교육을 받은 인재의 필요성이 증가하면서 대학교가 속속 생겨났다. 그러면서 고등교육을 받은 일명 진리의 상아탑 학생들 즉 대학생들이 속속 배출됐다. 그리고 1970년대부터 정부의 수도권 인구 분산 정책에 따라 서울에 위치한 사학들이 서울을 제외한 타지역에 캠퍼스를 설립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지방 분교의 시초가 됐다. 정부가 서울의 명분 대학 등에게 지방 분교를 세우라고 한 이유는 수도권 인구 분산 정책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베이비붐 세대의 대학 진출과도 연결돼 있다. 1960년생부터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를 하면서 서울 소재 대학교만으로는 감당을 하지 못하게 생겼다. 이런 이유로 수도권 인구 분산과 함께 베이비붐 세대의 학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분교가 생겨났다.

10만명 한꺼번에 늘려

박정희 정권인 1978년 10월 대학교 관련된 대책이 나왔다. 문교부는 당시 33.1%였던 대학진학률을 53.5%까지 끌어올리겠다는 것이다. 이에 1979학년도 대학 입학정원을 4만 9천490명 증원혹, 1980년에는 5만~7만명을 대폭 증원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2년만에 대학생 수를 10만명 늘린다는 계획이다. 문제는 교실의 부족이었다. 이를 위해 원래 계획은 서울 소재 대학교를 지방에 이전하고, 교실을 늘리는 방안을 검토했다. 하지만 서울 소재 대학들이 공동화를 내세우면서 반발하자, 박정희 정권은 새로운 대안을 마련했다. 그것은 서울 소재 대학들은 그대로 두면서 ‘분교’를 만드는 것이었다. 아울러 지방대학 야간 정원을 크게 확대했다.

대학들의 땅 장사로

하지만 이런 분교 논란이 결국 대학 법인의 땅 투기 장사가 아니냐는 비판도 일어났다. 또한 본교 학생과 분교 학생의 갈등이 제기되기도 했다. 본교 학생들은 자신들이 ‘정통성’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고, 분교 학생은 박정희 정권에 의해 탄생했기 때문에 본교와 분교의 차별을 둬서는 안된다는 목소리를 냈다. 다만 세월이 흘러가면서 단국대학교 한남캠퍼스가 지방으로 이전하면서 본교와 분교의 갈등이 해소된 사례도 발생하고, 일부 분교에서 본교의 행정까지 담당하는 등 대학에 상당한 변화가 있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