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 현재 한국정치가 이념과 집단주의에 함몰되어 의회 민주주의가 제 기능을 못하고 있는데, 그 근원은 2002년 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전직 병무청 부사관 김대업에 의한 이회창 후보 자녀의 병역면제 관련 의혹제기(허위사실 폭로)와 이를 민주당이 대선캠페인에 적극 활용한 소위 ‘병풍’에 있다.
허위사실과 가짜뉴스는 언론의 검증을 통해 걸러지고, 진실 보도가 되도록 하는 것이 언론의 역할과 책임이나 대선 5-6개월을 앞두고 발생한 ‘병풍’은 KBS·오마이뉴스 등 언론에 의해 확대보도 되었다. 당시 지지율 1위이던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부정적 여론형성으로 지지율이 급락하면서 민주당 노무현 후보에게 근소한 차이로 대선에서 패배하였다.
이후 ‘광우병 쇠고기 파동’(2008), ‘천안함 폭침 사건’(2010)과 ‘사드 배치’(2017) 관련 괴담 등 허위사실을 이용한 가짜 뉴스로 민심을 선동하려는 시도가 계속되어 왔다. 나치정권의 선전상 괴벨스는 “거짓말은 처음에는 부정당하고, 그 다음에는 의심받지만 결국에는 믿게 된다.”고 말했다. 선전·선동은 북한·중국과 같은 전체주의 국가뿐 아니라 권위주의가 발효하는 곳이면 세계 도처에서 아직도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27년간 지속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패배한 원인은 아테네의 민주주의의 황금시대를 연 페리클레스를 비롯한 시민 3분지 1의 목숨을 앗아간 전염병 외에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가 지적한 ‘중우정치(衆愚政治课)’에 의해 내부로부터 붕괴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페리클레스 사후 아테네 정치를 담당한 클레온 같은 선동정치가(Demagogue) 들은 대중연설로 민회(民會)의 다수를 점하고 있는 하층 시민의 감정에 호소하며 지지를 이끌어냈다. 클레온은 BC 425년 스파르타가 제안한 화평을 거부하고 필로스섬에 고립된 스파르타 부대를 정벌해 항복시킴으로써 장기적으로 스파르타와의 전쟁을 종식시킬 기회를 없애버렸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말기 아테네 중우정치의 대표적 사례로 시라쿠제(시칠리아) 원정(BC 415-413)과 아르기누사이 재판(BC 406)을 들 수 있다. 강경파인 알키비아데스가 민회에서 “적은 노력으로 큰 결실을 거둘 수 있다”고 선동한 아테네의 시라쿠제 원정은 스파르타 군대에 패배하면서 실패로 끝났다.
아테네 장군이었고 역사가인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다수가 시라쿠제 원정에 열을 올리자 반대하는 소수는 반대표를 던지다가는 비애국자로 낙인찍힐까 두려워 입을 굳게 닫았다”고 전하고 있다.
BC 406년 아르기누사이 해전에서 아테네는 70척의 스파르타 전함을 격침하고 자국 전함 155척 중 25척만 침몰되는 대승을 거두었다. 8명의 유능한 아테네 장군들이 스파르타 해군을 전멸시키기 위해 뒤쫓는 사이, 병사구조 임무를 맡은 2명의 함선장들이 극심한 폭풍으로 침몰한 아테네 전함 주변에 남아있던 1000여명의 병사들을 구조하는데 실패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장군들이 해군 병사들을 구조하거나 시신을 거두지 않았다는 의혹 제기는 아테네 민중의 분노를 일으켰고, 8명의 장군들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는 정치인들 선동에 민중이 동조하면서 장군들은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 판결을 받았다.
나중에 진실을 알게 된 아테네 시민들이 후회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과거사가 되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참전한 적이 있는 소크라테스(BC 470-399)가 유일하게 장군들 처형에 반대했다고 전해진다.
아르기누사이 해전 1년 후 스파르타와의 마지막 전투가 된 BC 405년 아이고스포타미 해전에서 지휘관을 잃은 아테네 해군이 스파르타 해군에 의해 전멸되면서 ‘아테네 시대’가 막을 내리고 스파르타가 그리스의 맹주로 올라선다. 선동정치에 의한 아테네의 몰락은 민주정치가 포퓰리즘을 통제하지 못하고 중우정치에 빠져 국가를 패망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역사의 교훈을 알려주고 있다.
1987년 헌법으로 민주정치의 발전을 이끌어오던 여야 정당은 이제 국정을 논하기 보다는 자기 진영의 이해관계가 우선이고 가짜뉴스를 생산하며 선거승리만을 쫓는 집단처럼 되면서 정치발전은 크게 후퇴하였다. 국민통합과 국가의 미래, 국익증진을 위한 본연의 역할보다는 국민을 분열시키고 세대별 지역별 계층별 갈등을 조장하는 한국정치가 변화와 혁신을 이루지 못하면 결국 아테네 중우정치의 현대판으로 남지 않을까 우려된다.
민주주의는 자유의 존중과 책임을 강조하는 개인주의와 이를 위해 권력을 분산시키고 통제하는 공화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예일대 헬렌 란데모어(H. Landemore) 교수는 민주주의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대중에게 ‘민주적 이성’이 필요하며 이것이 정치적 집단지성이라고 주장한다. ‘민주적 이성’이 작동하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실패하기 쉬운 제도이다.
존 슈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다수의 폭정’ 의 위험성을 지적하였고, <미국의 민주주의>를 쓴 알렉시 드 토크빌 역시 잘못된 다수결이 갖는 ‘다수의 횡포’를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위험요소로 지적한다. 집단사고(진영주의)와 포퓰리즘은 대중을 이런 ‘위험한 다수’로 만드는데 권력자가 이용할 수 있는 유용한 수단이다.
대중이 집단사고에 물들면 가짜뉴스에도 맹목적 ‘쏠림’이 일어나고, 합리적 공론장이 사라지는데 2008년 발생한 광우병 쇠고기 촛불시위 사태가 그 단적인 예이다. 선동정치가 한국 정치문화에 뿌리를 내리는 사이 정치권력을 견제해야 할 학자, 법조인, 언론인 그룹이 진영 포퓰리즘에 참여하면서 한국의 다원적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
한국 사회의 중도층이 집단사고의 문제점과 포퓰리즘 선동에 날카로운 비판의 잣대를 들이댈 수 있다면 허위사실과 가짜뉴스를 이용해 대중의 감성에 호소하는 정치적 주장들은 국민의 동의를 얻기 어려울 것이다.
이제 기후변화, 자원고갈 및 불평등 등 세계적인 이슈들에 대한 국가 간 협력을 위해 여·야 정치인들이 국론통합에 앞장서고, 한국인의 지혜를 모을 때이다. 작금의 여·야 이념 대립의 상황을 뛰어넘는 역사관과 함께 좀 더 넓은 국제적 시야를 갖고 있는 신진 정치인들의 등장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