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식민지근대화론

2023-09-15     어기선 기자
조선총독부./사진=연합뉴스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식민지근대화론은 식민지시대인 일제에 의해 경제가 성장하고 근대화의 토대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해방 이후 우리의 역사학은 ‘내재적 발전론이 강세를 보였다. 조선후기 자본주의 맹아가 싹트게 됐고, 만약 일제강점기가 아니었다면 자연스럽게 자본주의가 자라나고, 그로 인해 조선사회가 자연스럽게 자본주의 사회로 옮겨졌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꺾어 버린 것이 바로 일본제국주의고 이에 항일민족운동은 자주적 근대화의 기본동력이 됐고, 일제의 침략과 야만적 수탈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이론이 됐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오면서 뉴라이트에 의해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 수탈론을 비판하는 주장이 나오면서 식민지 근대화론이 나왔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식민지 근대화론은 일본의 자본주의가 식민지배를 통해 한국으로의 자본주의 이식 과정으로 풀이를 했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개항을 하면서 그때부터 일본의 자본주의가 잠처 조선 땅에 들어오면서 자본주의가 싹트게 됐다는 것이다. 즉, 조선시대부터 자본주의가 싹트기 시작했다는 자본주의 맹아론을 전면 부인한 것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1905년 을사조약과 1910년 한일병탄 그리고 1905년 화폐정리사업과 1923년 관세 철폐 등으로 인해 본격적인 자본주의가 뿌리를 내리게 됐고, 그로 인해 일본의 자본과 기술이 유입되면서 한국의 산업화에 기여했다고 판단했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사회의 수탈을 위해 무작정 억압으로 일관하지 않았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이들은 화폐정리 사업과 재정정리사업 등을 통해 근대적 재정제도를 수립했고, 토지조사 사업을 통해 근대적 토지 소유권 제도가 확립됐고, 1930년대 이후 산미증식으로 농업기반을 구축하고 농사방법을 개선함으로서 한국 농업의 한단계 발전을 했다고 주장했다.

허점투성이 식민지 근대화론

식민지 근대화론은 역사를 경제학적으로 접근했다는 점에서 참신하다는 평가가 있지만 단순히 수치만으로 당시 시대상을 모두 표현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단순히 조선시대와 비교를 하면 생산량 등의 변화는 있겠지만 그것이 과연 농민이나 백성 등에게 얼마나 혜택이 돌아갔느냐는 문제는 다른 문제이다. 즉, 엥겔지수 등등의 수치를 비교하거나 조선시대의 토지 개념과 일제강점기의 토지 개념 자체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며, 근대적으로 토지조사를 한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얼마나 토지 분배로 이어졌느냐는 다른 문제이다.

통계의 오류

산미증식계획 등에서 농업 생산량이 대폭적으로 증가를 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조선시대와 비교를 하면 농업생산량의 변화가 크지 않다는 것이 오늘날 학계의 시선이다. 무엇보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내놓은 것은 ‘통계자료’이다. 문제는 이 통계자료가 과연 얼마나 정확성을 담보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조선시대는 통계의 부정확성이 있었다. 이것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현대적인 의미의 통계조사를 하려다보니 오류가 빈번해질 수밖에 없었고, 그것을 수정하는 과정에서는 당연히 숫자의 증가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사과나무가 1천 그루가 조선시대에 있었고, 일제강점기에도 계속 1천 그루였지만 조선시대에는 통게의 부정확성 때문에 1천 그루가 아니라 5백 그루로 등록돼 있었다고 한다면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가 처음에 조사를 할 때는 8백 그루가 될 수도 있고, 두 번째 조사했을 때는 9백 그루가 될 수도 있다. 이를 과연 일제강점기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생산량이 증가했다고 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 1940년대 태평양전쟁 당시에는 그야말로 국가적 역량을 전쟁에 모두 투입해야 했기 때문에 각종 수탈을 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집안에 있는 숟가락 하나까지 조사를 해야 하기 때문에 그에 따라 명목상으로 통계 숫자가 증가한 듯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오히려 해방 이후 상황이 더 중요

식민지 근대화론의 핵심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자본주의가 조선땅으로 유입돼 산업화를 이뤄냈다는 것인데 그것은 북한은 몰라도 우리나라는 해당 사항이 없다는 것이 오늘날 학계의 시선이다. 왜냐하면 토지 문제의 경우 식민지 근대화론은 1910년대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토지개혁을 이뤄냈다고 주장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토지제도는 1950년 이승만 정권 당시 이뤄낸 농지개혁법 때문이다.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기반으로 한 토지개혁으로 인해 자영농이 증가하면서 오늘날 산업화의 발판을 마련했다. 식민지 근대화론의 또 다른 주장은 일제가 남긴 재산 즉 적산을 이어받아 그 자본으로 재벌이 출현했다는 것인데 문제는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적산 상당부분이 파괴가 됐다는 점이다. 즉, 1960년대 이후 산업화와 근대화는 아무 것도 없는 밑바탕에서 우리 선조들이 피땀에 의해 이룩한 것이지 일제의 유산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조선총독부가 해방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에 140억원이라는 조선은행권을 시중에 살포하면서 경제가 붕괴됐다는 점이다. 당시 조선은행이 보유한 현금이 40억원이었다는 점에서 일본은 패망하자마자 조선은행권을 마구잡이로 발권해서 조선땅에 풀어서 초인플레이션을 조장했다. 즉, 조선의 경제를 폭망하게 하고, 일본으로 도망갔다. 식민지 근대화론이 싹틀 토양을 아예 없애버리고 도망간 것이다.